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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늦은 저녁.

"우어, 추워."

장갑도 없어 빨갛게 얼어붙은 손을 싹싹 비벼가며 편의점을 나선 날 반겨준 것은 네온사인과 함께 온갖 색을 뽐내는 크리스마스 전구의 은근한 불빛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시간은 벌써 8시를 넘기고 있었다.
하늘은 캄캄했고, 찬 바람은 매정하게 불어와 내 얼굴가죽을 두들겼다.

'더 두껍게 껴입을 걸 그랬나......'

친구 놈들과 헤어지고 혼자 집에 돌아가는 길.
솔직히 말해서 트리라던가 장식이라던가 커플이라던가(제일 중요) 눈에 들어와도 기분이 무작정 좋지만은 않다.
시내의 거리를 가득 메운 커플들은 좋은 분위기로 즐겁게 재잘대는데 나란 놈은 혼자 편의점에서 찐빵 하나 사서 저녁을 때우고 있으니.
그래, 솔로의 설움이다 이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더 추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도 몇 달 전까지는 있었는데......'

순간 예빈이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바로 고개를 젓는다.
벌써 끝난 관계구만, 이제 와서 무슨 미련이 남는다고.
아니, 아직도 기억나는 게 더 신기하다.

'에라, 몰라. 모솔만 아니면 됐지, 뭘......'

애써 긍정적인 마인드로 씁쓸함이라는 감정을 지운다.
어차피 걔는 나 같은 놈 진작에 잊었을 텐데, 뭘 또 계속 생각하는 거람.
벌써 다른 남친 만들었을 수도 있는데 말야.
그러니까 이제 옛날 생각은 이걸로 그만!



머리도 둘, 몸도 둘, 팔다리가 각각 네 개인 신종 인류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다니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자연스레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찌뿌드드한 하늘.
곧 눈, 아니 비라도 확 쏟아져버릴 것 같이 어둡다.
그래, 제기랄. 이런 분위기에 비가 없어서야 되겠어?
보란 듯이 낄낄대는 빌어먹을 커플들, 비라도 쏟아져서 싸악 쓸어갔으면 좋겠는데.
하느님, 부탁이오니 제발 이 미천한 양 한 마리의 행복을 위해 손수 비를 내려주소서!
아니, 우박이면 훨씬 좋겠습니다!
딥 임팩트를 연상시키는 최대, 최고의 재앙을 이 조그마한 반도에 아낌없이 때려박아 주십쇼!
음, 순간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 같은 기분이다.
...지껄였지, 확실히.

"에라이."

왜 쓸데없이 예빈이 생각이 나서 말이야, 쯧.
괜시리 기분만 잡쳤다.
이런 내 기분은 알 가치도 없다는 건지,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간간히 들려오는 캐롤들은 서양말로 사랑 어쩌고 떠들어대는 것들뿐이다.
초를 쳐도 절간 근처 기념품 가게에나 보일 법한 초대형 초로 친다는 건가.
'울면 안 돼' 같은 순수한 동심이 묻어나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커플들의 귓동냥거리도 안 된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가게 운영하는 놈들 생각은 더럽기 짝이 없어요.
망할 속물들 같으니라고.
아, 그래, 제기랄.
빼빼로데이 때도 그렇고, 역시 너희들은 솔로의 적일 뿐이다 이거야.
역시 한국인이 중국집을 애용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어?"

왠지 꿇으면 지는 거다! 같은 경쟁 심리에 휘말려 집까지 걸어가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커플들 사이를 헤치고 시내를 빠져나오려는 찰나, 익숙한 토끼 귀 모양 귀마개를 봐 버린 건 정말이지 예상 외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저런 귀마개를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하는 생각과 동시에 떠오른 것은 어깨 근처까지만 내려오던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도 모르고, 난 가만히 고개를 돌려 귀마개의 주인을 찾는 최악의 실수를 범해버렸고,

"앗."

"엇."

그 결과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약간 이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 하느님 씨X......'가 내 속마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귀여운 디자인의 귀마개를 낄 법한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지 못한 나를 탓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정예빈, 몇 달 전에 헤어진 내 옛 여친.
날 시내에서 마주쳤다는 게 엄청 의외라는 듯 살짝 입을 벌린 채인, 코앞의 여자애.
기구한 만남에 예빈이도 나만큼이나 적잖게 놀랐는지, '앗' 하고 내뱉은 표정 그대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표현, 그것이 말짱 헛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1초를 소립자 단위로 쪼개서 하나하나 펼치는 듯한 기분.
첫 키스를 뺏겼을 때와 완벽히 똑같은, 그런 기분.
차라리 그 때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이 드는 상황이라면 쌍수 치켜들고 반기겠지만서도, 지금 상황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100% 다른 상황이었다.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앉은 우리 둘 사이의 공간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붙은 꼬마 전구의 불빛들이, 자연스레 스킨십을 하는 커플들의 모습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캐롤 소리조차도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그렇게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눈은 서로를 살피는 데 바빠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머리 모양...은 그대로고.
키는 못 본 사이 아주 살짝은 커진 것 같네.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정수리가 내 이마까지밖에 안 닿았는데, 벌써 눈이 정면에서 맞는다니.
그래도 다행인 건 헤어진 이후로 전이랑 다를 것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인다는 것쯤?
많이 달라져 있었다면 조금 씁쓸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아는 예빈이의 모습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어 안심해 버렸다.



"...안녕."

예빈이를 살피는 한편 머릿속으로 수백 번도 넘게 인삿말을 바꿔 반응을 시뮬레이팅하는 사이, 먼저 예빈이가 인사를 건네왔다.

"아, 우연이네."

정말 유감스럽게도 최적의 답을 찾지 못한 내 입에서 튀어나온 인삿말은 우연을 가장한, 변명 가까운 말이었다.
'우연만 아니었어도 다시는 만날 일 없을지도 몰랐는데'란 말을 절로 떠올리게 한 스스로의 인삿말에 절망했다는 건 비밀.

"그러게."

짧게 대답하는 예빈이.
고개를 살짝 숙여 눈길을 내리는 예빈이의 반응에 당황해 버렸다.

'역시 화난 건가?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아서 그런 건가? 다시 만나서 반갑다는 무언의 표시? 그게 아니면 순전히 일이 바쁜데 예상 외의 지인을 만나서인가?'

수많은 질문이 뇌리를 강타하다 못해 골수를 뚫는 듯하다.
뭐가 진짜 답이지? 난 어떻게 답해야 하지?
수많은 자문과 자답을 반복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식은땀도 흐른다.

"...시내엔 웬 일이야? 사람 많은 거 싫어하잖아."

침묵 끝에 한다는 게 뻔한 질문.
하지만 진짜 궁금하기도 하다.
뭔가를 사려고 온 거라면 종이가방이라던가, 하다못해 봉투라도 있어야 하건만 예빈이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은 상태다.
가던 방향으로 보아 집으로 가려던 건 맞는 듯한데, 바깥에 오래 있었던 것마냥 코는 새빨갛고.
뭔가를 사러 온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자신이 싫어하는 시끄러운 데에서 코가 빨개지도록 돌아다닌 걸까?

"응, 그게......"

예상외로 예빈이는 내 질문에 당황한 듯, 말끝을 늘이며 신발코를 바닥에 두어 번 두드린다.
물론 눈길은 바닥에 둔 채로다.
이 기행이 말해주는 것은 딱 하나.

"발 톡톡, 여전하네."

장난식으로 말했을 뿐인데, 예빈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발이 어색하게나마 멈추긴 했지만, 아직 신발코는 바닥에 닿은 채.
거짓말을 지어내려고 생각할 때마다, 예빈이는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신발코를 두드리곤 했다.
몇 달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찐빵이라도 먹을래?"

가족 몫으로 챙겨 두었던 찐빵 세 개 중 하나를 꺼내 내밀자, 예빈이가 고개를 들어 내 손을 쳐다봤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 손에 들린 찐빵을.
신이 노린 한 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내가 내민 찐빵은 예빈이가 좋아하는 단호박맛 찐빵이었다.
머뭇머뭇 다가와 찐빵을 건네받은 예빈이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먹어도 돼? 하고 묻는 강아지의 눈을 보는 듯해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먹어. 괜찮으니까."

내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예빈이는 찐빵을 물지 않았다.
대신, 아까보다 더욱 머뭇거리며 내 손을 잡을 뿐이었다.

"어...?"

따뜻한 온기가 예빈이의 것임을 눈치채, 나도 모르게 바보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예전의 예빈이었다면 하지도 않았을 대범한 행동.
그런 행동을, 헤어진 지 몇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하고 있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그런 내 맘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예빈이는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다.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순간, 왜 예빈이가 안 하던 짓을 했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던 예빈이었으니, 시내 한복판에 서서 대화를 나눈다는 건 예상치도 못했겠지.
아아, 그래서인가?
처음에 고개를 숙였던 게, 시끄러운 주변 환경이 익숙치 않아서 그랬던 건가?
옛날에도 약간 얌전하고 소심한 면이 있긴 했지만, 아까만큼은 아니었다.
직접 입에 담았으면서도 생각지 못하다니, 전 남자 친구 실격이로구만.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생각한 변명이지만 말이 안 된다.
당연하지, 내가 이 애한테 한 짓이 어떤 짓인데.
먼저 차 버린 것도 모자라서, 전화도, 문자도, 톡도 무시했다.
몇 달 동안이나 자신에게서 도망치던 비겁자가 갑자기 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반기는 비겁자의 얼굴을 보고 뭘 하고 싶었을까?
옛날처럼 친한 척하며 실실 웃는 비겁자의 행동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지금 이 순간, 비겁자를 잡아끌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뻔하잖아, 젠장.



전장에서 도망친 탈영병에게 내려질 벌은 참형뿐.
마음이 남아 있던 상대에게서 도망친 비겁자에게 내려질 벌은?
글쎄,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 대한 처분을 내리는 사람도, 나에게 벌을 내릴 사람도 예빈이뿐이라는 것밖에는.

"하......"

원망스레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본다.
정말 하늘은 날 놀리기로 작정한 듯, 내 이마에 흰 눈송이 하나를 떨어뜨린다.
그것을 신호로, 갑자기 하늘 가득 쏟아져 내리는 백색 눈.
정말 이렇게 타이밍 좋게 눈을 쏟아내다니, 하늘 이 새끼.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린다.
따스한 손의 감촉만이 느껴진다.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을, 따뜻한 족쇄가.
  • profile
    Octa 2014.05.22 16:14
    솔로들이 이 소설을 보며 씁쓸해하는건 덤인가요?
    괜찮아요. 전 크리스마스따위 생각하지 않아요.
    크리스마스는 바로 소련이 공식적으로 망한 역사적인 날이랍니다~.................
  • ?
    개소실 2014.05.23 07:26
    허허허.
    뭐, 어차피 저도 솔로니까요.
  • profile
    리븐 2014.05.23 00:50
    아 하늘이여... 전 아직 모솔이지만...

    주인공의 착잡함이 저한테도 오는것 같네요...
  • ?
    개소실 2014.05.23 07:26
    저도 솔로인걸요, 뭐.

    것보다 이거 연작으로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 profile
    Just 2014.05.23 12:34
    저도 할줄 알그등여
  • ?
    개소실 2014.05.24 08:09
    하세여 흥흥
  • profile
    곧별 2014.05.24 11:18
    감정을 없애고 읽는...
  • ?
    개소실 2014.05.28 08:21
    지운다.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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