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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나, 문득 고개를 든다. 거리의 사람들. 무관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나를 반긴다. 움츠러든 나, 다시 고개를 내린다. 지나가는 발, , . 소리를 남기지 않는 아스팔트가 고맙다. 고개를 숙인 채인 나, 메모장을 편다. 오늘의 글. 오늘 하루를 살 글을 끄적인다.

 

아스팔트는 검다. 그냥 흑 일색이다. 명암이 존재해도 색에 가린다. 어떤 색깔이든 가리고 본다. 어떤 바탕이든 뒤덮고 본다. 어둡게 만든다. 흔적만 어렴풋이 남긴다. 그야말로 암흑의 왕국이다.

 

이 대목에서 정지. 스무 살의 나, 진저리를 친다. 나는 아스팔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스팔트는 대지를 뒤덮는다. 대지는 아스팔트에 눈이 가려진다. 대지의 입장에서 아스팔트는 나쁘다. 고마운 아스팔트라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셈이다. 나는 아스팔트의 악행을 그대로 적는다. 고발을 하듯 주루룩 써제낀다. 어깨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진다. 바로 고개를 깊게 숙이는 나.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는 지나간다.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무안해진 나, 다시 시선을 노트에 고정한다. 시간은 흐른다. 발이 아픈 나는 벤치에 앉아 노트에 적는다.

 

수많은 발이 지나간다. 발소리가 아스팔트에 잡아먹힌다. 수많은 걸음을 아스팔트는 잡아먹는다. 발소리와 걸음을 잡아먹는 아스팔트는 사람도 잡아먹는다. 그 사람이 남긴 흔적까지 잡아먹는다. 아스팔트는 위험하다. 그렇다고 아스팔트를 없앨 순 없다. 그러기엔 우린 아스팔트에 너무 익숙해졌다. 우리는 언제나 먹힐 위험을 자처한 셈이다.

 

눈이 쑤셔 손을 멈춘다. 눈가를 부비며 앞을 바라본다. 발을 집어먹을 듯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보인다. 사람도 일렁이게 만드는 아지랑이가 보인다. 나는 아지랑이가 무섭다. 아스팔트는 무섭지 않다. 아스팔트는 위험하지만 무섭지 않다. 하지만 아지랑이는 무섭다. 잡아먹힐 것만 같아 무섭다. 아지랑이와 함께 일렁이다 아지랑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 무섭다. 아지랑이처럼 형체마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무섭다. 회색의 나, 도망치듯 벤치를 떠난다.

 

색깔이 그리운 나. 하지만 아스팔트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 아스팔트에 먹힐 것만 같아 두려운 나. 끊임없이 발을 놀리는 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나. 형체 없는 공포가 뒷발을 갉아먹는다. 무서워진 나, 급하게 건너편 건물로 뛰어든다. 밝은 빛이 나를 반긴다. 찬 공기가 나를 반긴다. 밝은 한기, 차가운 태양이 나를 내리쬔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으스스함에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 바닥이 하얗다. 안심한다.

 

사람이 말을 건다. 어서 오라고 말을 건다. 어서 들어와 이 낙원을 즐기라는 듯. 먹히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듯 말을 건다. 나는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안으로 발을 옮긴다. 수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온갖 색깔들이 진열되어 있다. 알록달록한 것이 예쁘다. 예쁜 색깔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에 민감한 나,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카운터 건너편의 사람 하나가 나를 보고 있다. 흥미가 아닌 의심이 담긴 시선. 정신이 번쩍 든다. 이곳은 낙원이 아니었다. 이미지의 대비는 눈속임일 뿐임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된다. 온갖 색으로 정신을 흐리는 공간임을 이제야 알게 된다. 아스팔트의 흑색을 가리는 거미집임을 이제야 알게 된다.

 

나는 또다시 형체 없는 두려움을 마주한다. 카운터 밑의 그림자가 낄낄댄다. 거 봐, 차라리 내가 낫지. 대답도 못한 채 나는 뒷걸음질 친다. , . 새까만 구두가 하얀 바닥을 내려치며 외친다. 꺼져라, 가식덩어리들아. 허나 바닥은 대답이 없다. 날 보고 있던 카운터의 사람도 신경 쓰지 않는다. 차가운 빛도 반응이 없다. 구두가 뭐라 하던 거미집은 침묵한다.

 

침묵이 두려워 거미집을 허둥지둥 나온다. 아지랑이는 보이지 않는다. 차갑게 식은 피부가 눅눅한 공기와 만난다. 따뜻하다. 부모의 품에 안긴 것만 같다. 형체 없는 두려움은 어느 샌가 사라져 있다. 회색의 나, 안심하는 한편 걱정한다. 이제 어디로 간담? 누구도 내게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여유에 어색한 나, 망설인다. 어디로 가야 한담? 아지랑이만 피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 허나 그 아지랑이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굳이 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럼 정말 어디로 가야 하나? 누군가 답을 내려주길 바라는 나, 주위를 둘러본다. 거리는 한산하다. 검정 일색의 구둣발도 보이지 않는다. 끼어들 틈새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읊조리듯 중얼거려 보아도 발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어떤 답도 찾지 못한 나, 일단 무작정 걷기로 한다. 첫 발을 떼는 순간.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기요, 길 좀 물읍시다.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다. 타인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온 것이다. 놀란 나, 허둥지둥하다 마침내 뒤로 고개를 돌린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본의 아니게 놀라게 만들어 버렸나 보네요. 목소리의 주인이 머쓱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말하고 있다. 습관적으로 아래를 본다. 하늘색, 예쁜 색의 신발이다. 내 또래처럼 젊은 피부를 가진 사내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마음에 드는 사내다.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부러운 사내다.

 

괜찮습니다. 제가 소리에 좀 민감해서요. 생각과 대답은 평소처럼 어긋난다. 입은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단순한 놀람은 입이 부리는 마술에 소리에 민감한 체질로 변모된다. 멋대로 대답을 지어내는 입이 원망스럽다. 그런가요? 주무실 때 불편하시겠어요, 그런 체질이면. 거짓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는 사내. 나도 고개를 마주 끄덕여 준다. 그렇지요. 그보다, 길이라 하심은? 내 말에 이마를 탁 치는 사내. 맞다, 그렇지. 제가 여기, 이 곳 지리를 잘 몰라서요. 혹 순수동이라고 알고 계시는지요? 사내의 물음에 나는 떠올려본다. 내가 보았던 곳들을 떠올려본다. 내가 살았던 곳들을 떠올려본다. 없다. 순수동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기억조차 없다. 아니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사내의 얼굴이 아주 살짝 흐려진다. 그런가요. 이것 참, 난감하네요. 너무 외지에만 살다 와서인지, 이 동네도 많이 바뀌는 바람에……..

 

그의 말에 나는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순수동, 처음 듣는 동네에 흥미가 동한 것이다. 어쩌면 그 곳은 아스팔트 없는, 온갖 색이 가득한 곳일지도 모른다. 회색에서 벗어나고픈 나, 그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 어떻게든 찾을 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멋쩍게 웃으며 말을 끝맺는 사내. 사내가 떠나려 함을 나는 본능적으로 눈치 챈다. 아스팔트로부터 벗어나고픈 나, 그를 붙잡으며 말한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함께 길을 찾아드리지요.

 

길을 걷는다. 아스팔트를 지나 회백색 콘크리트 도로를 걷는다. 저벅, 저벅. 사내의 발소리가 들린다. 뚜벅, 뚜벅. 나의 구두소리가 들린다. 콘크리트 도로는 아스팔트와 다르다. 발소리가 남고 색깔이 남는다. 검은 구두들은 이 도로를 한결같은 소리로 지나가기를 좋아한다. 허나 지금은 검은 구두들이 없다. 어색한 적막 속에서 나와 사내는 계속 길을 걷는다. 이곳도 많이 변했네요. 사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나는 문득 과거의 도시가 궁금해진다. 예전에는 이곳이 어땠지요? 내 질문에 사내는 꿈결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온갖 색들이 수수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곳. 수많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수많은 자기만의 발자취를 남기는 곳. 땅보다는 하늘을 보고 다니는 곳. 나는 사내의 이야기 속 동네를 떠올린다. 약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제는 뭐, 보시다시피 이렇지만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나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저 바닥을 보며 걸음을 옮길 뿐이다. 뚜벅, 뚜벅. 사내의 발소리가 내 구두소리에 가려진다.

 

콘크리트 도로가 끊어졌다. 우리는 이제 보도블록이 촘촘히 박힌 길을 걷는다. 우리의 옆을 형형색색의 차들이 지나친다. , 저 차 정말 예쁘네요. 사내가 탄성을 내지르며 말한다. , 정말 그러네요. 나는 차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답한다. 차들은 검은 정장들의 거미집임을 나는 알고 있다. 예쁜 색은 눈속임일 뿐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속에는 검은 아스팔트의 일부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검은 구두, 검은 정장만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스팔트 위를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될 뿐이다. 나는 굳이 사내의 감탄에 반응하지 않는다. 한동안 호들갑을 떨던 사내는 이내 조용해진다. 차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지른다. 자신을 과시하는 소리다. 나는 걸음을 빨리한다.

 

우리는 정류장에 도착한다.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다. 건물 사이로 주황빛의 태양이 보인다. 주황빛을 정면으로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우리.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요? 사내가 물어온다. 글쎄요, 어디로든 가야지요. 나는 대답하며 노선표로 시선을 옮긴다. 어디에도 순수동이라는 이름은 없다. 하지만 우린 정말 어디로든 가야 한다. 이곳이 순수동일 리는 없으니까. 그냥 다른 사람에게 물어봄이 낫지 않을까요? 사내가 다시 물어온다. 대답해주지 않을 겁니다. 나는 짧게 대답한다. 어째서요? 사내는 계속 물어온다. 그들은 아스팔트에 녹아들었으니까요. 나는 친절하게 대답한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검은 정장과 검은 구두들. 그들은 아스팔트에 녹아든 사람들이다. 아스팔트에 녹아든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만을 생각한다. 아스팔트와 자신만을 생각한다. 아스팔트에 녹아들지 않으면 배척한다. 아스팔트에 얼마나 녹아들었는지에 따라 대우를 달리한다. 아마 사내는 잘 모를 것이다. 색이 있는 신발을 신는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그것이 아스팔트 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럼 당신은 아스팔트에 녹아들지 못한 건가요? 사내가 물어온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다. 글쎄요, 녹아들지 못한 건지, 녹아들지 않은 건지……. 사내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부담스러운 눈빛이다.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그러고 보니 전 당신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사내는 집요하게 물어온다. 나는 이유 모를 압박을 느낀다. 이 사내에게 이름을 알려줘야만 할 것 같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이라는 소설에서 나오는 기법을 약간 채용해 저만의 방식으로 이용해볼까 하여 만든 실험작입니다. 초반부에 약간 몰입감이 떨어지는 면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양해를 바랄 뿐입니다.

  • profile
    Octa 2015.04.08 06:50
    신기한 문체네요 약간... 시같기도 하고요! 잘 봤습니다^^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