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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철의 푹푹 찌는 오후, 난 침대에 엎드려 유유자적히 책을 읽고 있었다.

"유호, 유호오---"

그리고 나보다 2년 후에 태어나 최고의 오빠를 얻게 된 행운의 여동생, 유희는 내 등 위에 올라타 주먹으로 내 뒷통수를 두드리고 있었다.

"유호오오---- 무시하지 말고 얘기 좀 들어줘 봐!"

이렇게 유치하게 대화를 유도하는 녀석이 열다섯 살이라니, 오빠로서 언젠가 진지하게 정신적 성숙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기는 하는 건지 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계속 무시하면 침대 밑에 있던 책들 전부 아빠한테 택배로 보내버린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랑하는 여동생 양. 이 오빠는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는 여동생의 말을 무시할 생각이 조금도 없답니다."

넵, 그러니 부디 침대 밑의 그녀들만은 무사히 풀어주시옵소서.

"음! 어제 유호한테 편지 한 장이 왔다고 해서 뜯어 봤거든?"

...응, 역시 내 동생. '내 것이 아니면 주인에게 얌전히 돌려준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구나.

"그래...... 그런데?"

하지만 여기서 말을 끊으면 정말로 나의 그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가까스로 딴죽을 참아낸 후 조심스레 묻자, 갑자기 유희가 눈을 빛내며 분홍색 편지지를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분홍색 편지지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빼곡히 무언가 적혀 있었다.

"유호, 고백 받았던데?"

순간, 짧은 적막이 유희와 나 사이에 흘렀다.

"뭐?"

"읽어 봐. 완전히 유호한테 빠진 것 같더라고. 꺄아---"

촤락!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편지지를 뺏어든 후, 재빨리 눈을 놀려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당신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 같은 반의 민지혜입니다. 이렇게 굳이 편지를 써서 괜한 불편을 안겨 드리는 것은 아닌가 염려됩니다만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자신이 없어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부득이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가,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19일 오전 10시 30분, 학교 운동장에서 답변을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들어 유희를 바라보니, 이미 유희는 엄청나게 흥분한 상태였다.

"뭐야,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유호한테 반했다니, 꽤 눈 높은 사람인가봐!"

"으, 음...... 일단 이 오빠를 높게 쳐준 점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한다만, 이건 너무......"

"너무?"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희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세상을 너무 단순무식하게 사는 나의 여동생이여, 언제쯤 너는 각성할 것이냐......

"갑작스럽다고. 지혜를 내가 아예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이렇게 고백을 할 이유가 없을 텐데......"

거기다 지혜 성격을 생각해 봐도 말야.
공부 잘 하고 책 읽기 좋아하고 말수 적은, 말 그대로 100% 문학 소녀 타입이란 말이지.
이렇게 과감하게 러브레터를 보낸다, 라.

"솔직히 진짜 지혜가 보낸 건지조차 의심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유희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유호는 여자의 마음을 하나도 모른다니까."

뭐, 이 녀석아?
그럼 넌 남자의 마음을 얼마나 안다고!

"흥, 오빠는 아직 여자에 관심이 없어서 말야. 그래도 말이지, 적어도 유희 네 마음쯤은 뻔히 들여다볼 자신 있거든!"

"우왓, 진짜?! 오빠 독심술사였어?!"

그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냐.
것보다 호칭 바뀌었다고, 너.
호칭 하나에 캐릭터가 바뀌는 이 세상이 두렵지도 않냐.

"독심술 같은 건 없어! 내 여자 경험을 무시하지 말라고!"

"뭐? 작년까지만 해도 또래 여자애들한테 말 건 횟수가 딱 한 번뿐이었던 유호가? 선생님 심부름이라 어쩔 수 없다며 마음 먹 고 시도해봤더니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바람에 존재마저 부정당했던 유호가 여자 경험?"

콰광!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클레이모어(미국 지뢰)가 마음 속에서 폭발해 버렸다!

"제기라아아아알!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는 거냐아아아아!"

절규하며 땅을 치는 내게 날아오는 여동생의 자만심 넘치는 한 마디!

"훗, 내 오빠 경험을 무시한 유호의 패배야!"

오빠 경험이 뭔데, 오빠 경험이!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지, 그렇게 우쭐거리라고는 말하지 않았거늘!

"사실 유호 일기장 훔쳐봤지롱♪"

"죽어라, 우주 최악의 여동생!"

집어던진 책을 몸을 살짝 트는 것으로 피한 유희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깔깔깔! 그렇게 나약한 힘으로 이 나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 어라?"

판타지 소설 속 악역의 대사와 완벽히 똑같은 대사를 내뱉던 유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못... 해......"

"어, 어라? 유호? 저기, 오빠님---"

안 됐구나, 여동생이여.
이 방법만은 쓰지 않으려 했건만, 내 마지막 인내심마저 파멸시켜 버린 네게 건넬 자비는 더 이상 없다!

"용서 못 해-------!"

"꺄아아아아아----!"

유희의 약점인 옆구리.
그 옆구리를 사정없이 간지른다!

"잊어! 잊으라고! 머릿속에 담긴 나에 대한 정보, 모두 삭제해 버리란 말이다아아앗!"

"꺄핫! 끄흐흣, 후잇! 니야하핫! 오, 빠핫! 미안, 미안흐아니까! 이, 흐이잇! 잊을게요! 잊을게요오오오!"



"...해서 일단 오빠의 자존심은 회복했지만 말이지."

정작 19일인 오늘이 되고 나니 가슴이 미친 듯 떨린다.
우와, 뭐야 이거.
이게 그 말이나 책으로만 봤던 '청춘'이란 놈이냐?
10대의 젊음이란 예상외로 대단한 것이었구나, 새삼 느낀다.

"흐읍, 후우, 흐읍, 후우......"

심호흡이다, 심호흡.
지금의 나, 초 긴장 상태니까 말야.
어디 보자, 유희의 추천 메뉴얼대로 입어봤는데 말야.
괜찮을까, 이 옷차림으로?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그 지혜라고?
과묵하고 책 좋아하고 공부 잘 하는, 예쁜 편인데도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애들이랑 접점도 적은, 그런 애라고?
그러고보니 내가 지혜와 접촉한 적이 있긴 했던가?
아, 있었다.
3월 초에 옆에 앉았었지.

나도 친구 사귀느라 정신없었다, 그 땐.
그러면서도 매일 있지도 않은 사람처럼 조용히 책만 읽던 지혜가 신경쓰였고.
여자애한테도 말을 섞어보자, 란 결심을 하게 된 궁극적인 계기도지혜와의 첫 접촉이었지, 아마?

[저, 국어책 같이 봐도 될까?]

깜박하고 교과서를 두고 오는 바람에 곤란했던 내가 지혜에게 말을 걸었던 날.
그 날부터 난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뭐,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만.'

지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날 보지도 않은 채 슬쩍 교과서를 밀어줄 뿐이었다.
그런 지혜를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오, 고마워.]

[......(끄덕)]

[이름이... 민지혜? 좋은 이름이네.]

[......]

[아, 미안. 쓸데없는 말이었나?]

[......(도리도리)]

[으, 으응......]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솔직히 말을 건네면서도 걱정했다.
하지만 지혜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내 말을 잘 들어줬다.
너스레를 떠는 건 아닌가, 멋대로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닌가 고민하면서 쭈뼛쭈뼛하던 나도 어느샌가 긴장을 풀고 편하게 지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책 많이 읽던데, 좋아하는 거야?]

[......(끄덕)]

[나도 책 싫어하진 않는데. 주로 어떤 장르를 읽어? 아, 난 추리 소설이 좋더라.]

내 말에 고개를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하던 지혜는 그 때 처음으로 입을 실룩였다.
오오, 말하는 건가? 내심 기대도 해 봤지만......

[연애물]

[...고집인지, 성격이 그런 건지......]

교과서에 살짝 끄적이는 지혜를 보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

[아, 아냐 아냐. 연애물이라, 의외구나 싶어서.]



그렇게 수업이 끝날 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한 일.
생각해보면 그 일 이후로 지혜와 접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솔직히 그 때도 내가 혼자 들떠서 계속 말을 건 거지, 정작 지혜는 별 반응 없었잖아.

"그런 지혜가 갑자기 고백이라니......"

솔직히 아직도 안 믿긴다.
뭐랄까, 벌칙 게임 같은 걸로 어쩔 수 없이 한 것 같다.
잠깐, 어쩔 수 없이?
괴롭힘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아니겠지, 그건?"

말로는 부정하지만,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본심이 따로 있는데 괴롭히는 놈 때문에 강제로 나 같은 놈한테 고백하고 있는 거라면......
젠장, 여기 어디서 몰래 숨어서 보고 있는 건가?
내 반응을 보고, 괴로워할 지혜를 보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썩을 자식...!"

피가 끓어올라 녀석이 숨어있을 법한 곳을 찾고 있자니,
톡, 톡.
무언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 같은 조그만 충격이 느껴진다.

"뭐야, 갑자기......"

비라도 내리나 하는 마음에 위를 올려다보지만 하늘은 말끔하다.
그렇다는 건......

"......"

조용히 뒤를 돌아본다.
'화단 안에서 뭐 해' 라고 물어보기라도 하듯 날 바라보고 있는 사람.
길고 예쁘게 다듬어진 검은 머리칼이 찰랑이는 가운데, 편지를 보낸 주인공의 눈과 나의 눈이 맞는다.

"...안녕?"

"......"

묵묵부답.
다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평소와 다름없는 지혜의 모습에 아까까지만 해도 열 올라 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하하...... 언제 왔어?"

"......"

손바닥을 내미는 지혜.
펴져 있는 손가락은 일곱 개뿐이다.

"세 시간 전?!"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다.

"아, 30분 전인가...... 그럼 9시 50분쯤에 왔겠네?"

이번에도 도리도리.
뭐야, 또 틀렸어?

"그럼... 3분?"

아싸, 정답!
...이라니, 퀴즈 푸는 것도 아니고.

"아아, 그렇구나......"

"......"

"하하, 하하하......"

"......"

끊어진 대화.
분명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갑자기 당사자를 만나니 머리가 멍해진다.
음, 이 침묵을 어떻게 하면 좋지?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