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는 중2병을 모른다 1 - 판타지는 스타트가 미묘하다.

by 개소실 posted Sep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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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령아. 엄마가 너무 바빠서 놀아줄 수가 없어요. 다음에 시간이 나면 그 때 놀자!"
어머니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지지, 지지지지지지───── 마치 텔레비전의 노이즈를 연상케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뒤돌아본 어머니의 모습이 점차 변색된 TV처럼 괴랄하게 꼬여간다.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그에 따라 화면 역시 조금씩 깨끗해져간다. 이윽고, 화면이 비춘 눈 앞의 장면에는───
한 명의 소녀가 있다.
"어서, 어서 정신 좀 차리시고 여기로 오세요!"
손을 뻗는 소녀의 모습이 저 멀리에, 어렴풋이 보인다. 하지만, 소녀를 따라 뻗은 손은 소녀와 턱없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닿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위해 발을 뗀 순간, 커다란 손이 눈 앞을 가린다. 소녀의 목소리도, 손도 그 커다란 손이 단번에 차단해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모든 것들은 다시 가려지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채 다시금 단일한 리듬을 타고 울려퍼지는 소리가 되어, 끊임없이 날 괴롭힌다────



3월 2일 월요일. 아침 일찍 디지털 시계의 알람이 울기 시작했다.
[삐삐삐삐삐삐삐, 삐삐삐삐삐삐삐, 삐삐삐삐삐삐삐───]
"…아으윽……."
일어나기 싫어 가벼운 신음과 함께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무자비한 디지털 알람은 끊임없는 단일한 사운드로 쉼없이 정신공격을 행했다.
"시끄러워 죽겠네……."
안 그래도 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꿔 기분이 더러운데, 알람마저도 시끄럽게 짖어대니 머리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다. 확 베개를 던져버리려다, 씻고 정신 차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관뒀다. 최대한 몸을 이불로 둘둘 말아 소음을 차단한 후 팔 한 쪽만 빼내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뻗자, 손끝에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해졌다. 손을 위로 더듬어 스위치들의 크기와 위치를 가늠하고, 알람 스위치로 추정되는 커다란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머리를 웅웅 울리게 하던 알람소리는 그쳐주었다.

멍하게 눈만 뜨고 생각없이 있다가, 창 밖에서 노니는 참새들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재빨리 남아있던 몽롱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이불을 차내고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아───."
쭈욱 뻗은 팔마디와 등에서부터 두두둑, 하고 굉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품을 너무 크게 한 탓인지 머리가 띵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아침부터 두통이라니. 꿈 때문인가, 제대로 잠을 못 잔 것 같다.

 


항상 그래왔지만, 역시 봄이 시작하는 시기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다. 아무도 듣지 못할 불평을 중얼중얼 늘여놓은 후,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바닥의 슬리퍼를 찾아 발을 더듬다가, 그냥 맨발인 채로 침대를 벗어났다. 찬 기운이 발을 타고 몸에 퍼져가는 것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창가의 커튼을 열어젖히자, 약간 검푸른, 맑은 하늘이 날 반겨주었다.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아침. 새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뽐내듯 여기저기서 울고 있었고, 밖의 도로는 움직이는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아 고요했다. 잠시 멍하게 창 밖의 광경을 보고 있다, 문득 시간에 생각이 미쳐 아까의 디지털시계의 액정을 보았다. 시계는 05:53, 이라는 숫자를 출력하고 있었다. 평소 기상시각이랑 비슷비슷한, 그런 시간.

화장실에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계단을 내려오자 아버지께서 소파에서 주무시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또 '좁은 공간은 내게 맞지 않아', 하시면서 나오신 거겠지.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겨울처럼 추운 초봄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3월 초라는 시기는 아침 기온이 꽤 낮기에 아무것도 덮지 않으신 채로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가 꽤나 신경쓰였다. 마침 구석에 개어져 있던 얇은 담요를 펼쳐 덮어드리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 참, 적어도 이불은 덮고 주무시라니깐요."
아버지는 들으신 건지 못 들으신 건지, 그저 한 번 가볍게 뒤척일 뿐이셨다.

허리를 두드리며 거실을 휘이 둘러보다, 무의식적으로 탁자로 눈을 돌렸다.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조그마한 액자가 눈에 띄었다. 유일하게 어머니가 찍혀 있는, 단 하나의 가족사진. 무엇엔가 이끌리듯 액자를 집어 들여다보았다. 노란 줄무늬 셔츠에 조그만 책가방을 등에 멘, 무표정의 나와 그런 꼬마를 안은 채 함박웃음을 띄고 있는 붉은 옷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입은 옷과 같은 색의, 아니 어쩌면 더 짙은 색깔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넘기시는 어머니의 뒷모습. 분명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찍은 사진이랬지.
'뭐,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의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서 거부하려 드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미소는 너무나도 간단히 굳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때 '어린 감자'라는 단편집을 출판한 것만으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유명 작가셨다. 지금은 작가 일을 모두 접고 집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계시긴 하지만, 심심해서 대충 휘갈겨 보셨다는 '어린 감자'가 출판된 지 약 2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작으로 일컬어지고 있을 정도이니. 여튼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진 작가셨고, 또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래, 어머니라는 인물은 내게 있어 어색한 존재이다. 지금껏 난 외가의 친척들뿐만 아니라, 어머니 당신마저도 제대로 뵌 적이 없었고, 어머니 역시 지금까지 내 앞에 제대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세계를 두루 여행해야 하는 어머니의 직업상 어쩔 수 없다고 아버지께 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기억이 하나도 없는 내게 있어 어머니란 존재는 말 그대로 '남'인 것이다.
 
'하아…….'
이제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내겐 8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기억이 끊어진 것처럼, 내 기억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 순간부터가 내 인생의 시작인 것처럼 되어 있다. 경험자이기에 당당히 말하지만, '기억이 없다'는 건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모두가 '어머니'라고 부르고, 사라진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를 찾아보아도 내게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 기억나겠지'라고 끊임없이 자기위로를 하며, 아무리 머릿속을 더듬어보아도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일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지금의 나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마치 빈 껍데기가 된 기분에 휩싸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나에게 집착하게 된다────
 
"…고, 옛날엔 생각했었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다지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다. 과거의 내가 어떤 기억을 가졌고,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던간에 지금의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으니까. 물론 어색하고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 이대로 행복하고 만족하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정말로 지워진 기억이라면 돌이킬 수도 없는걸."
액자를 다시 탁자에 올려놓자, 그제서야 잘 펼쳐진, 흰색 글자가 빼곡한 빨간 편지지를 볼 수 있었다. 그 옆에 내용물을 뺀 분홍빛 봉투의 착신지로 보아, 아버지 앞으로 온 어머니의 편지인 듯하다.
"붉은 색 편지지에 분홍빛 봉투라……."
…보통 편지지가 붉은 색인 건 그다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할 때 쓰는 색, 아니 그 전에 크리스마스가 아니면 아무도 안 쓰지 않나? 분홍빛 봉투 안에 있을 내용물치고는 어째 좀 색이 그런데.
"…알 게 뭐람."
그래, 내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든, 지금의 나에게는 남일 뿐이니까.

 


편지는 아버지께 온 것이니 딱히 내가 읽을 필요는 없어 보였기에 그대로 두고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 변함없이 깨끗한 싱크대와 조리도구들이 날 반겨주었다.
"자자, 오늘의 아침은……."
혼잣말을 하며 냉장고를 연 후, 시원하게 보관해 둔 토마토와 식빵, 양배추와 달걀, 그리고 베이컨을 꺼내들었다.
"가볍게 샌드위치로 가 볼까."
베이컨은 살짝 구워내고, 간을 맞추지 않는 것으로 필요 이상의 나트륨 섭취를 예방할 수 있고, 토마토는 다 떨어져 없는 우유 대신 수분 섭취를 위해 생으로 내오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식단으로는 탄수화물, 단백질, 당분, 무기질과 비타민만을 적절량 섭취할 수 있을 것이다. 칼슘 섭취가 미약한 건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오늘만은 넘어가고,  수업 끝나고 돌아오는 시간에 저녁 찬거리 살 때 우유도 같이 사야겠다.

"아, 령아. 벌써 일어나 있었니?"
베이컨을 굽고 있자니, 등 뒤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께서 산발이 된 뒷머리를 긁적이시면서 부엌으로 들어오시고 계셨다. 손에는 방금 내가 덮어드린 잘 개진 담요가 들려 있었다.
"아,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커피는 거기 위에 올려뒀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다시 프라이팬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여튼 고맙다, 담요."
"아뇨, 뭘요."
뒤에서 평소와 변함없는 아버지의 큰 하품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웬지 좋은 하루가 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자, 선택하시죠."
"흐음……. 꼭 둘 중 하나여야만 하니?"
"당연하죠! 자, 어서!"
오전 6시 40분, 세면을 끝내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오신 아버지와 나는 지금 막 아침 준비의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를 거치고 있었다. 그것은,
"케첩입니까, 잼입니까! 고르세요!"
"으으으으…!"
바로, 샌드위치의 마지막 양념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응, 아버지의 양념 리퀘스트는 매일 달라지니까. 좋아하는 게 하루에 한 번씩 바뀌는 아버지의 변덕을 내가 맞춰드리는 것이 우리 가정의 기본적이며 암묵적인 룰이다. 물론 너무 폭넓은 선택의 기로에 막혀 요리의 본질이 유실될 것을 대비하여 특별한 때가 아니면 간단하게 양자택일식으로 정하고 있지만서도.

"…정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무엇으로 정하셨습니까?"
이윽고, 아버지께서 진지하신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날카롭게 교환되는 눈빛, 묘하게 흐르는 짜릿한 긴장감, 짧은 정적.
"───케첩이다!"
"네. 잼은 치울게요."
아버지는 결국 흡족과 허망 사이를 오가는 듯한 미묘한 표정으로(그만큼 진지한 상황이었나…….) 케첩을 곁들인 샌드위치를 집으셨다.

"…후."
희진이 것도 만들어 랩으로 싸놓은 후에야, 이윽고 내 몫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숨을 내쉬며 거실 소파에 앉아 갓 만든 샌드위치를 조금 베어물었다. 무의식적으로 바라본 창 밖에는 회색빛 구름이 베일처럼 가리고 있던 하늘이 붉게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밝게 채색되어가는 장면이 비쳐지고 있었다. 조금씩 밝아지는, 하지만 아직 검푸른빛을 띠고 있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1주 전의 그 날이 생각났다.
"…괜히 나갔지, 그 땐."
허무하게 중얼거리면서, 다시금 샌드위치를 깨물었다.

정확히 지난 주 월요일, 아버지께서 잠깐 여행을 다녀오신다며 나가신 지 이틀째 되었던 날. 이 날 난 우연히 원래 기상시간보다 일찍 일어나버렸고, 다시 자는 것도 찜찜해 건강도 챙길 겸 운동을 나갔었다. 가볍게 옆 동네의 큰 공원까지 다녀온다는 게, 어쩌다 이상한 판타지덕후 꼬마를 만나는 바람에 나도 모르는 사이 꽤 시간을 잡아먹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후 알게 된 시각은 예정 귀가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있었고, 떨어뜨린 물통을 찾으러 공원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물통뿐 아니라 꼬마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조금 더 주변을 서성이다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버렸고, 아침을 먹으러 우리 집으로 와 있던 희진한테 실컷 야단맞았다.
"조깅은 개뿔. 이제 다시는 운동한다고 하나 봐라……."
다시 한숨이 나왔으나, 이번엔 샌드위치 대신 토마토를 입에 물었다.
그 순간,

 


"이야아아아앗! 하루!"
"컥, 쿨럭!"
복부에 강렬한 스트레이트 바디태클이 들어왔다. 덕에 입에서 싱싱한 토마토 과즙이 뿜어져 나올 뻔했다. 이 쓸데없이 높은 텐션, 내 이름을 하루라고 부르는 버릇. 분명, 그 녀석이다.
"하루, 하루, 하루! 오늘 아침은 뭐야?"
"쿨럭, 쿨럭! 언…제나 말하지만, 그 '하루'란 이름으로 부르지 좀 말라고……."
막무가내로 거실 창문을 통해 불법침입해온 이 녀석은 내 소꿉친구인 유희진. 나와 동갑인,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를 녀석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이 가까워 썩 친하게 지내온 사이이고, 요새도 등교할 시간만 되면 집으로 놀러와 피곤하게 만들어주는, 정말이지 귀찮디 귀찮은 녀석.

"뭐 어때! 하령이나 하루나, 글자 하나 차인걸!"
"차이 커! 엄───청 크거든! 것보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람…!"
그러고보니 이 녀석, 지금 시간이면 한창 자고 있을 시간대잖아! 뭐 이리 쌩쌩해?
"헤헤…, 한번 맞춰 봐!"
그렇게 말하고는, 멋대로 내 몫의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희진.

"맞춰 보긴……. 것보다 그거 네 거 아냐. 네 건 랩으로 싸서 따로 보관해놨다고."
희진의 손에 들려 있던 내 몫의 샌드위치를 도로 탈환한 후, 싱크대 쪽에 올려두었던 싱싱한 샌드위치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희진은 내 손에 들린 샌드위치와 랩에 싸인 샌드위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뾰루퉁해진 표정으로,
"그거 줘! 그걸로 먹을 거야!"
하며 어느새 내 손에 있던 샌드위치를 빼앗아 한입 더 베어물었다.

언제나 마이 페이스인 희진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건 설령 나라고 해도 쉽게 꺾지 못한다. 차라리 내가 포기하는 게 빠르겠지.
"대체 왜 새 거 놔두고 그걸 먹는 건데……."
"응, 당연히 령이의 맛이 나니깐!"
"변태냐."
가끔 희진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바보처럼 웃으면서.
"치, 하루 바보."
희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좀 많이 남아 있던 샌드위치 조각을 입 안에 밀어넣었다.

"그것보다 웬일로 일찍 일어났네? 신학기라고 새롭게 마음 다잡은... 건 아닐 테고."
새로운 샌드위치의 랩을 벗기며 희진에게 물었다.
"마어오아이안. 애 이이 이디 이어아으아?"
"음식물 입에 넣고 말하지 마. 이해 못 하니까."
토마토 하나를 희진의 손에 얹어주자, 희진은 토마토를 슬쩍 보더니 입 안에 있던 그 많던 내용물들을 한 번에 삼키고는,
"아, 따로 주지 말고 넣어주지!"
…라고 말하며, 그 토마토마저도 단번에 입에 넣어버렸다.

"먹을 때의 넌 참…, 신기해."
진심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걸 칭찬으로 들은 건지 어느새 토마토도 다 삼켜버린 희진이 얼굴을 붉혔다.
"헤헤헤, 뭘."
"칭찬 아니다."
태클로 가벼운 손날 공격을 날리자, 희진은 재밌다는 듯 웃어주었다. 그런 희진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도,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하루! 그건 그렇고 내 퀴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7시 10분, 소란스러웠던 식사가 끝나고 잊혀졌었던 아버지와 희진과의 가벼운 잡담(과 티타임)이 어느 정도 계속되었을까, 갑자기 희진이 하던 말을 끊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응? 무슨 퀴즈?"
"또, 또! 모르는 척!"
갑자기 손날로 맞았다, 그것도 희진한테!

"아니, 정말로 몰라서 하는 소린데…?"
"응? 하루, 설마 단기기억상실증?"
희진이 갑자기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이마에 손을 댔다. 지금, 나 아픈 사람 취급당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단기기억상실증이랑 발열은 무슨 관계?
"아까 말했잖아! 내가 왜 이리 일찍 왔을까~ 하고!"
…아, 그랬지.
"아아, 그랬었지. 아마도, 확실히."
"아마도, 확실히' 라는 건 뭐야!"
희진한테 결국 한 대 더 맞고 말았습니다. 뭐, 이건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서? 어쩌다 이리 일찍 일어난 거야? '여자에게는 잠은 보석 같은 거예요', 라면서 주말마다 하루에 10시간은 자던 우리 잠꾸러기 유희진 양이?"
"…어째 어린이 취급 받는 기분이야."
앗차, 들켰나.
"아냐, 아냐."
"흐음…, 그냥. 별 거 아니고……. 오늘따라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이상한 기운?"
아아, 또 나오는 건가. 최근에 시작된 희진의 '중2병' 컨셉이.

"왜, 그런 거 자주 있잖아? 갑자기 느껴지는 어떠한 '이질적인 느낌'에 움찔한다던지, 장난감이 많은 집이라는 전제 하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무심코 맨발로 레고 블록을 밟는다던지, 잠깐 졸다가 높은 데에서 떨어지는 꿈 같은 걸 꾸고, 추락이 끝나는 순간에 다리가 멋대로 움직여서 갑자기 정신이 차려진다던지."
"…맨 앞의 예시는 감이 안 잡히는데, 나머지 두 예시가 너무 현실적이라 뭐라고 반박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어……."
"여튼! 오늘 아침,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더라니깐! 갑자기 몸을 훑고 지나가는 찬 기운 같은 불길한 느낌이!"
그렇게 운을 뗀 희진은, '마나'니 '마법'이니 하며 헛소리들을 잔뜩 늘여놓기 시작했다.

희진이 이런 괴이하고 덧없는, 청소년 전용 동화 같은 중2병에 빠져버린 건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도 작년 여름때부터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 주변의 유행이나 말에 쉽게 이끌리는 성격인 터라 금방 지겨워하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쉽게 그만둬 주질 않는단 말야. 설마, 숨겨진 본능에 눈을 뜬 거라던지…….
"잠깐, 하루 듣고 있어?"
"하루 아니라니깐……."
…그런 건 아니었음 좋겠다, 진짜로.

※작가의 말 : 네, 개소실입니다. 웬일로, 프롤로그부터 작가의 말을 적던 제 버릇과는 다르게 1편에서 이렇게 주저리를 시작하는군요. 뭐, 어차피 제대로 보시지도 않으시겠지만. …크흡.

아, 생각해보면 엄청난 실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업 시간에, 그것도 고교생이란 녀석이 맘 편하게 폰으로 글을 쓰다니요. 덕에 담당 교사에게 걸려 한 학기(…!) 내내 폰을 뺏기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 버렸습니다. 비축분은 1편분이나 떨어졌는데, 그만큼의 전개를 할 시간은 부족하고. 엄청나게 부족하디 부족한 시간을 대체 어디서 메워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그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상당히 연재가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어영부영 4편까지는 마무리짓겠습니다만, 5편부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아니면 예상외로 창작욕에 불타 금세 써 버릴지도 모르고요.

이 한심한 작가의 글을 읽어주시는 작가님들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추신 - 패치 완료.
           수정된 사항 - 프롤로그 중반부 소개 부근 살짝 수정, 1편 세부사항 크게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