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는 중2병을 모른다 5 - 주인공은 하렘 주인공이 아니다.

by 개소실 posted Oct 0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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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드득, 빠득. 하도 밟고 지나가서 단단해져버린 눈은 걸음을 뗄 때마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으와, 춥다."
편의점에 들러 칫솔과 치약을 산 후, 가볍게 배를 채울 끼닛거리를 사들고 거리로 나오자마자, 엄청난 기세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계절로 따지자면 초봄이긴 하지만, 역시 지구온난화의 영향일까. 거리에 희뿌옇게 곰팡이처럼 눌어붙은 눈들은 아직 사라질 기미도 안 보이고, 한겨울에나 몰아칠 법한 칼바람이 지금까지도 불어오고.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명색도 이제는 끝장인 걸지도 모르겠다.

"뭐…, 그래도 봄이라고 새싹은 돋았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날씨에도 거리에 서 있는 가로수들의 가지에는 푸릇푸릇한 새싹이 붙어 있었다. 겨울의 흔적이 끈질기게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봄을 맞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음에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나무.
"…시 쓰고 싶다."
아아, 이렇게 사색에 잠기기 좋은 날엔 역시 시가 최고지. 옛 성현들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취지로, 나도 한 번 해 볼까.

"시라니, 꽤나 엔틱한 취미네요. 시라는 예술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선 학생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면 닥치고 하나하나 공부시켜야 하는, 시험의 단골손님으로 취급하는 줄 알았는데요."
머릿속으로 그럴 듯한 시를 지어내고 있으려니, 꽤 경쾌한 또래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태클을 넣어왔다.
"무슨 소리야. 오히려 이런 자아성찰하기 좋은 상황에 자신만의 시를 읊을 줄 알아야 진정한 낙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거지."
가볍게 그 태클에 반박을 한 후에야, '이 여자는 누구지?' 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버렸다. 애초에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목소리였는데, 난 어쩌자고 이렇게 간단히 대답한 걸까. 게다가 나한테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는데!

"흠, 글쎄요……. 어째 꽤나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네요."
"…그렇게 부르는 건 그만둬 줘. 취향은 존중받기에 존재 가치가 있는 거니까."
소녀와 나의 대화가 정상적으로 연결되는 걸로 보아 소녀는 다른 누구가 아닌 내게 말을 걸어온 것 같지만, 그렇기엔 아직 이상한 점이 있었다. '누가', '왜' 내게 말을 걸어 온 것인가. 일단 목소리의 톤으로 보아선 내 또래의 여자라고 대충 추정해 볼 수 있었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남이 말을 건 이유는 조금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역시 이럴 땐, 함부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겠지.

나와의 간격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종종걸음을 치는 듯, 조그마한 뽀드득 소리가 뒤에서 시끄럽게 들려왔다. 몇 개의 가로수를 지났을까,
"음, 그런데 이 정도로 대화를 했으면 보통은 뒤돌아서 '누구지' 하는 식으로 얼굴을 쳐다보거나, 하지 않나요?"
소녀 쪽에서 가볍게 말을 걸어왔다. 좋아, 이제야 대화를 좀 해볼 수 있겠구만.
"응? 그거야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거 아냐? 애초에 널 모르긴 하지만..., 아니 그보다 내가 널 모르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심리전. 내가 시도한 대화는 일종의 심리전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틈을 찔린 척하며 은근 상대에게 반문. 적어도 '사람을 잘못 봤다'는 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자신도 모르게 왜 말을 걸었는지 정보를 흘리기 마련이지.

"예, 물론이죠. 전 그 외에도 당신에 대한 걸 당신보다 더 잘 아니까요."
…갑자기 뜬금없는 발언. 뭐지, 이 여자는? 이게 그 유명한 '도를 아십니까' 같은 건가?
"아아, 그렇구나. 라니, 믿을 거 같냐 그런 말."
어물쩡 웃어넘기려니 하면서 가볍게 뱉은 말이었지만,
"당신, 기억이 지워져 있잖아요?"
짧은 순간. 눈길을 세 번 밟은 그 짧은 순간에, 소녀는 굉장한 말을 내뱉어 버렸다.
"…너, 대체 누구야."
그제서야 난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음, 글쎄요. 이 세상에서는 저희를 부르는 방식이 너무나도 애매해서 말이예요."
긴, 하지만 비단처럼 고와 보이는 주황빛 머리가 아무렇게나 휘날리고 있었다. 백옥같이 흰 피부 속에서도 눈에 띄는, 에메랄드 색의 아름답게 빛나는 커다란 눈, 그리고 그 색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핑크빛 조그만 입술.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예술적인 얼굴과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후줄근하게 보이는 검은색 츄리닝과 맨발이 훤히 보이는 삼선 슬리퍼가 상당히 거슬리지만, 그래도 그것만 빼면 미녀라고도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나와 겨우 3cm 남짓하게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그 소녀는, 핑크빛의 조그만 입술을 움직이던 참이었다.
"마녀, 라고 해야 할까요?"



"후아───! 역시, 이쪽 가게에서 파는 커피가 맛있다니까요! 이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달달함, 그리고 이 넘칠 듯 말듯하게 올려주는 토핑! 점원들 센스도 좋고, 여러모로 굉장하다구요!"
"…지금 가게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이쪽 가게. 이 카페가 들어서기 세 달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은 편의점 대용으로 사용해도 무난했던 슈퍼 비슷한 가게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제부터 제대로 카페가 들어서자 자연스레 이 동네로 단골 손님들이 몰려왔고, 자연스럽게 이 동네 메인 카페가 되었다고.
"아니아니, 지금 나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은 카페 광고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 눈 앞에서 기쁜 듯이 정체불명의 토핑이 가득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저 마녀, 라는 녀석의 정체를 밝혀야만 해.

"자, 쓸데없는 서론은 집어치우고 말해보자고. 일단, 넌 누구지?"
"에이, 그런 무거운 이야기는 관두고 일단 마시자구요. 자, 봐요! 이 넘쳐나는 크림 토핑을!"
"이게 술이냐! 그리고 그 커피잔 저리 치워! 토핑 값만 5천원이라니, 무서워서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겠다!"
소녀, 아니 마녀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다시 커피잔을 기울이더니,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인중에 크림이 묻은 것이 보였지만,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으이구, 칠칠맞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직접 닦아주었다. 마녀는 순간 깜짝 놀란 듯 날 바라봤지만, 이내 그녀의 관심은 다시 커피로 몰렸다.

"슬슬 시간이 없다고. 자, 빨리 말해 줘. 넌 대체 누구길래 내 기억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
커피 한 잔을 30분에 걸쳐 전부 마셔버린 마녀에게 초조하게 물어봤으나, 마녀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에이, 마녀라니까요. 왜, 마법 쓰는 여자요."
"장난 집어치워. 마녀라던지 마법사라던지 그런 헛소리는 이제 질렸다고."
한숨을 쉬며 턱을 괴자, 마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살짝 의자를 끌어당겼다. 마녀의 얼굴과 내 얼굴의 거리가 꽤 가까워졌지만, 마녀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정말, 이 세상에는 마법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마녀의 말투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실려 있는 묘한 압박감에, 순간 대답을 머뭇할 뻔했다.
"…응. 전혀."
하지만 나 역시 호락호락한 놈은 아니고, 그렇기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하아……. 이렇게나 고집쟁이셨을 줄은 몰랐네요."
마녀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내 앞에 놓여있던 커피잔을 들어 내용물을 들이켰다.
"야, 그거 내 커피───"
"전 야, 가 아니라 메르닐이에요."
"메르닐…? 아니, 이름은 됐으니까 내 커피 내놔!"

커피잔을 탈환한 후 내용물의 양을 살펴보니 한 1/2 정도 줄어있었다. 그 짧은 시간만에 이만큼이나 마시다니, 이 녀석은 뜨거운 것도 못 느끼는 건가?
"왕고집에 쪼잔하기까지. 여친은 생기겠어요?"
"시끄러워. 애초에 여친 같은 거, 생각하지도 않고."
한 번 쏘아붙인 후, 처음으로 커피를 들이켰다. 순수 아메리카노를 시켜서인가, 쓴 맛만 입안에 감도는 게 꽤 실망스러웠다. 역시 내게 사치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아. 자, 커피 타임도 끝났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제발."
쓰기만 한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시고는, 텅 빈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예상외로 크게 들려온 탕, 하는 소리에 주위의 사람들이 흘끗 곁눈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녀, 아니 메르닐은 얼굴로 흘러내린 주황빛 머리칼을 머리 뒤로 쓸어넘긴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하령 씨께 먼저 질문을 몇 가지 드리고 싶네요."
메르닐은 아직 밝히지도 않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나에 대해 사전 조사를 했던 건가.
"…응, 뭐든 말해 봐. 답할 수 있다면 성심성의껏 답해주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해 뭐라 말할 때가 아니다. 이 녀석의 기분에 맞춰 대화를 유지시키는 것이 현 상황으로는 최선.

"첫째, 왜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잖아. 첫째, 난 지금까지 마법을 본 적이 없어. 둘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십, 수백억의 사람들 중에서 마법을 쓸 줄 안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역시 들어본 적 없고. 셋째, 지금까지 마법에 대해 진지하게 논해 온 사람들은 대다수가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들로 밝혀졌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마법이라는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것의 존재를 진지하게 긍정했던 사람들 중 정상인은 없었어. 자, 이상."
하지만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판타지 요소의 존재마저 수긍해 주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지금 나의 목적은 '대화의 유지', 그게 전부니까. 내 대답을 들은 메르닐은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이번엔 옆 테이블의 사람들도 들릴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좋아요, 두 번째 질문. 말도 안 되는, 그러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말이죠, 여튼 기이한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던가, 그 때 이상한 신체현상이 발생했다던가. 1주 전, 그런 일이 있지 않았나요?"
순간, 머릿속에 1주일 전의 그 일이 떠올랐다. 하늘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캄캄했던 벌어진 공간,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던 황금색 빛. 그리고, 그 장면을 보기 전에 느꼈던 심장의 따끔함.
"…없어."
하지만, 절대로 이 마녀 앞에서는 그 일을 말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 모를 불안감이 온 몸을 지배한 것을 눈치챌 새도 없이 입이 멋대로 두 글자분의 아주 짧은 말을 낮고 빠르게 내뱉었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 말을 뱉어낸 직후였고, 그것을 눈치채자마자 신기하게도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반사 신경이라는 건가.

"흠. 없다, 라고요?"
메르닐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차가운 눈, 정말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꿰고 있을 것만 같은 에메랄드빛 동공. 그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이유 모를 한기는 너무나도 싸늘해 그것을 바라보는 내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머릿속은 끊임없이 공회전했고, 마음은 왜 내가 거짓말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머리 대신 찾으려는 듯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
하지만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이 상황이 방금 전의 거짓말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기라도 한 양 내가 나 자신의 입을 의식적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어떤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적어도, 이 마녀 앞에서는.

"…왜 거짓말을 하시는 거죠?"
메르닐의 목소리는 언제부터인가 싸늘해져 있었다. 주변의 공기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이 메르닐을 중심으로 서서히 얼어가는 것만 같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주 뚜렷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오늘로부터 1주일 전, 하령 씨는 '검은 손의 처형자'가 '하이브'로 귀환지가 설정되어 있는 포탈을 여는 모습을 분명히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령 씨의 존재를 대변해 줄 무언가를 압수당했을 테고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의식적으로도, 무의식적으로도 입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나는 무엇이든 말하려 했으나, 눈 앞에 존재하는 한 마녀가 뿜어내는 위압적인 기운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메르닐은 그 기운을 거두지도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지금, 전 하령 씨를 위협해 무언가 해를 끼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하령 씨가 하는 뻔한 거짓말에 놀아날 생각도 없어요. 단, 지금 하령 씨의 입장이 상당히 위험한 자리에 놓여 있으며, 전 하령 씨를 돕기 위해 여기 왔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 온 거죠. 자, 이제 제 용건은 끝났으니 하령 씨의 생각을 말해 주시죠. 그래야지 이 무의미하게 엇갈리는 대화의 중점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차가운 기운은 서서히 사라졌고, 난 가까스로 참아왔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왜 숨을 참고 있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벌어진 이 모든 일들 역시 하나같이 알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눈빛만으로 온 몸이 굳어버려 숨 쉬는 것마저 잊었다는 것도, 지금 나의 입장이 꽤나 위험하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보기엔 오히려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는 눈앞의 마녀(라고 주장하는 존재)가 내 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모두. 대체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만 벌어지는 걸까, 하는 의미 없는 자문의 대답을 찾고자 다시금 기억을 더듬으려니,
"빨리 대답해 주셨으면 하네요. 아까 하령 씨가 말씀하셨듯 저 역시 시간이 없으니까요."
메르닐이 차갑게 내뱉고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위협이 되는 적의 행방을 찾는 듯한, 날카로운 행동.

"난,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난 아직도 메르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그럼으로써 그녀가 벌인 기이한 행위, 그녀의 존재, 더 나아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 '마법'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다. 판타지의 신이 있다면 당장에 따져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체, 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길 원하는 판타지 오타쿠나 중2병 환자들이 꿈꿀 법한 일을 하필이면 그들과 정반대의 입장인 내 앞에 벌여놓는 것인지. 정말 그런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가 내 앞에 나타나 자신의 사디즘에 대한 자랑을 끊임없이 늘여놓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난 당당하게 그의 면전에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휘두르며 엿이나 먹으라고 외쳐줄 수 있을 텐데.

"…좋아요. 지금 당장은 절 믿지 못한다, 란 건가요. 그럼 '감시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직 제대로 모든 것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애꿎은 상상 속의 신에게 신랄하게 욕을 날리던 날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던 메르닐은,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천천히 말을 끝마치고는 고개를 돌려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바깥에서 강하게 불어닥치는 칼바람의 잔해가 아주 잠깐 카페를 휘감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따뜻한 히터의 열기가 후끈하게 와닿았다. 살짝 고개를 들어 테이블을 보니 메르닐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대신 메르닐이 두고 간 커피잔 옆에 조그마한 유심칩(USIM) 비슷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조그맣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살짝 고민했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살짝 건드려보았다. 꽤 부드럽고 따뜻했던 그 물건은 손가락에 닿자마자 곧바로 손가락으로 빨려 들어왔고, 그 직후 바로 머릿속에서 메르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정말로 신변에 위험이 느껴지는 때가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좋으니 절 불러주세요. 어디에 있든, 뭘 하든간에 당신을 보호하러 가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온 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 잠을 잔 건지, 가게의 점원으로 추정되는, 왠지 어디서 들은 적 있어보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나의 단잠을 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저, 손님? 슬슬 일어나심이 어떨까요…?"
스르르 감겨 있던 눈을 뜬 후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카페의 웨이트리스 의상이 보였고, 살짝 눈길을 더 올리니 상당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언제 이 얼굴을 봤더라? 이 정갈하게 뒤로 땋아놓은 검은 머리를, 어디서 봤더라?

"...여."
"......"
묵묵부답.
"오늘 꽤 많이 보인다. 그, 이름이 뭐랬지, 아. 지온휘."
"..., 가......"
"뭐?"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귀에 손을 대는 짓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지온휘는 순순히 내 귀로 입을 옮겼고, 나직이 한 마디를 읊조렸다.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