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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똑바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그야말로 허허벌판, 완벽한 백색의 광경만이 비칠 뿐이다.
"아, 아."
입을 열어 소리를 내 본다. 고요함 속에 울려퍼지는 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허나 대답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적어도 갇힌 건 아닌가."
소리가 반사되지 않고, 갑갑한 느낌도 안 드니 밀폐된 공간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특별한 촉감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행동의 지침이 되어 줄 만한 무언가를 조금도 찾을 수 없다.

"뭐야, 이거…?"
무심코 바닥에 손을 댄 후에야, 내가 지금까지 서 있던 이 공간이 상식과는 많이 동떨어진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닥이 있어야 할 공간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발을 딛고 설 수도 있었고 걸어다닐 수도 있었는데, 정작 손을 뻗어보니 허공과 다른 게 없었다. 이리저리 휘저어보고, 주먹을 쥐어봐도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가둬진 공간은 아니면서, 작용 · 반작용 법칙은 무시된다, 라."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알 수가 없는 곳이네. 하긴 그러니까 상식과 많이 동떨어져 보였겠지.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본다. 달리 보이는 건 없다. 아까와 같이 하얗고 텅 빈 공간만이 날 반겨줄 뿐. 슬슬 머리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하면서, 의문점이 팝콘 터지듯 톡톡 튀어나온다. 여긴 대체 어디지? 난 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 오게 된 거지? 그리고,
 
난 대체 뭘 하고 있었더라?
 
 

"……."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뭣 때문에 여기로 오게 된 건지. 가장 최근의 기억이라면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가까운 편의점에서 몇 개 사들고 나온 일. 그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흐르게 된 건지, 무슨 변을 당한 건지조차도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갑자기 초조해진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이 어디든, 얼마나 좋든간에 이 곳이 내가 오기로 결정한 곳이 아니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이 무한히 지속될 것만 같은 적막도 답답하게 다가오기 시작하고, 어디까지 뻗어진 길인지, 애초에 길이 맞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무한한 백색의 공간이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냐, 아냐. 정신 차리자, 나."
그래, 이렇게 혼란 상태에 빠져버리면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확실하게 정신차리고, 확실한 목표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법한 방법을 침착하게 찾아보자─────
 
"───라고 하기는 했는데,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아까부터 일직선으로만 걸으면서 나갈 길을 찾아보았지만, 계속 제자리만 빙빙 도는 것처럼 똑같은 배경만이 날 반겨주었다. 애초에 아무리 걸어도 계속 백색으로 일관된 풍경뿐인데, 직진을 한 건지 여기저기 어슬렁거린 건지 제자리만 빙빙 돈 건지 어떻게 알겠어.
"젠장, 뭔가 표지가 될 만한 게 있어야 끝없는 길인지, 똑같은 길인지 알지."
나무조각이라도 있었음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자마자 머리에 가벼운 충격이 전해졌다. 손을 들어 머리를 털자, 툭 하고 조그마한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건가?"
그럼 여기서 나가게라도 해 주던가, 투덜대며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바닥에 나뭇가지도 떨어뜨렸으니, 적어도 어떻게 되어먹은 건지는 알 수 있겠지.
 
"아, 아까 그 가지다."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바닥에 거뭇거뭇한 무언가가 보여 다가가보니 아까 머리에서 털어낸 나뭇가지였다. 이것으로 난 아까부터 게속 똑같은 길을 반복해서 걸어다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쓸데없이 발품만 판 거잖아."
맥이 풀려 제자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손으로는 만져지지도 않았던 공간이 마치 평범한 땅바닥처럼 날 지탱해주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디 눕는 것도 되나, 하고 어정쩡 몸도 눕혀 보았다.

"아아, 훨씬 편하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누워 있다는 자각만이 있을 뿐. 등이 꽤나 휑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나름대로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아 신선한 기분이었다.
"아으으으으."
기지개를 켜고, 눈을 살짝 감았다. 잠을 자고 싶진 않지만,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금방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것도 괜찮으려나. 어차피 무슨 원리로 돌아가는 곳인지도 모르겠고, 탈출 장치라던가 보이지도 않으니. 그냥 이대로 포기하고 잠드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맞아,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꿈일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냥 자 버리자.



[…령……, ……일………….]
띄엄띄엄, 심하게 일그러져 마치 변조된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고, 애초에 너무 변절된 상태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요, ───무──────────]
더 심하게 노이즈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몸이 쑤시다. 날카로운 통증, 쑤시는 고통이 점점 심하게 느껴지고, 두근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아……! …………면, …명………는……말……!]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귀로, 머리로,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심장의 소리가, 생명의 소리가 ─ 너무나도 약해 곧 꺼질 것만 같은 생명이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 해 울부짖는 소리가 ─ 온 몸으로 느껴진다. 아주 조그맣게 떠져 있던 눈을 통해 주변을 보려 해도, 고개가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시야가 흐려져 있지만.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 시야를 가린다. 저항할 힘조차 없어 되는대로 눈을 감는다.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
그리고 난, 갑자기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주변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새하얀 배경만이 가득한 괴상망측한 공간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고동소리는커녕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노이즈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훔치자, 식은땀이 닦여 나와 손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으로 여기에 있는 나는 꿈 속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된 건가.
"왜 다시 왔냐고, 묻고 있잖아요."
얼마나 오랫동안 자고 있었던 거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꿈 속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리다니? 서서히 고개를 들어 보니, 흑수정처럼 새까만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소녀가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지만, 그것 외에는 거의 전체적인 면에서 나와 닮아 있는 소녀.

눈 색이라던가, 머리 색이라던가, 얼굴의 형태라던가, 피부 색이라던가 여러모로 같은 점이 많았다. 뭐, 머리 길이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길고 목소리의 톤이 나보다 더 높으며 그,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곳의 굴곡이 육안으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조금 더 크다는 점만 제외하자면. 그러고보니, 얘 옷을 하나도 안 입고 있────
"────?!"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소녀의 몸으로부터 눈을 뗐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하는 소녀에게서 단숨에 등을 돌리고 눈을 가려 나름 시야를 차단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눈을 돌려 저 소녀의 몸을 훑어본다면, 난 그야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이 되고 말 거야! 조금이라도 더 강한 충격을 받으면 곧바로 끊어질 것만 같은 내 이성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웠는데……."
피보나치 수열을 머릿속으로 외고 있던 나의 등 뒤에서, 소녀의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눈물 섞인 목소리가 너무나도 아련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손을 내리고 말았다. 아니, 겨우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이 울음소리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기억이 나의 사라져버린 기억의 조각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그보다도 더 깊은 곳에 있는 그 무언가가 나도 모르게 작동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튼 난 마치 무언가에게 홀린 듯, 손을 내리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날, 필요로… 끄윽! 하지, 않는다는, 당신을……. 끅! 이제야, 겨우─── 흐읍,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소녀는, 어느 새 내 바로 뒤에 와 내 등에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저, 저기……."
아무런 생각 없이 열린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소녀가 나의 등을 끌어안았다. 옷에 스며들어 차가워진 눈물을 사이에 두고, 소녀와 나의 따뜻한 몸이 만났다. 소녀의 볼이 내 볼에 닿았고, 동시에 소녀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소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나의 몸을 달콤하게 감쌌고, 따뜻한 몸의 감촉이 옷을 뚫고 피부에 그대로 전해졌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 지도 모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도 몰라서 그냥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직도 구슬피 울고 있는 소녀의 머리를, 왼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줬다.
"…울지 마."
쉴 새 없이 소녀의 귀에 속삭여주며, 그냥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녀는 드디어 울음을 그쳤다. 하지만 소녀의 팔은 내 몸을 끌어안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똑같은 속도로 뛰는 두 심장, 완벽히 한 몸처럼 느껴지는 똑같은 체온. 아무리 우연이라고 자기합리를 하려 해도 이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모든 것이 나와 똑같다니. 물론 머리 길이라던가 목소리라던가 키라던가 그 곳… 여튼 확연히 다른 점도 있지만, 큰 특징들을 빼고는 전부 나와 다를 게 없다. 대체 이 소녀의 울음소리에, 왜 무의식 속의 나는 반응했던 걸까. 이 소녀는 대체 누구이며, 나와는 어떤 관계였던 걸까. 조금도 알 수 없어 생각하면 할수록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다시, 생각해주시는 건가요?"
나지막한, 그리고 꽤 잠긴 목소리가 등에서 들려왔다.

"……."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 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기억에도 없는 나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섣불리 답할 수도 없었다. 지금같은 상황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최적의 대답이겠지.
"아니… 에요?"
소녀의 손이 내 가슴께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몸을 서서히 더듬어 올라오던 손은 곧 심장 부근에 닿았고, 그대로 멈췄다. 두근, 두근. 기분 좋은 심장의 고동이 소녀의 따뜻한 손으로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미안."
역시 거짓말은 할 수 없다. 어정쩡한 대답으로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야 지금 당장 사실대로 말하고 이 상황을 피하는 편이 좋겠지. 일단 소녀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비단을 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감촉을 애써 무시하고, 조용히 몸에서 떼어냈─────
"도망치려 하지 마요."
소녀가 강하게 손을 뿌리치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와 동시에 몸을 더 바짝 붙이고,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니, 지금의 나는……."
당황스레 소녀에게 사실을 밝히려 하는 나의 말을,
"알고 있어요."
소녀는 간단하게 가로채버렸다.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이 기억을 소거당한 것도,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모두."
소녀가 마치 혼잣말을 하듯 조그맣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바로 귀 뒤에서 속삭이듯 정확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었는데도, 끝까지 당신은……."
소녀의 말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뜨거운 눈물이 다시 옷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스러웠다. 소녀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랑 너는 무슨 관계였던 거야?"
상처줄 지도 모른다, 잘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끊임없이 입을 막으며 계속 경고했지만, 그만큼이나 절실히 알고 싶었기에 가까스로나마 입을 열 수 있었다.

"모르시겠죠. 앞으로도 평생 모르고 사실 수도 있고요."
소녀는 금방 눈물을 그치고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이제야 확실히 마음을 진정시킨 모양이었다. 소녀가 끌어안은 팔의 힘이 풀리기 시작했고, 그 덕에 나는 몸을 돌려 소녀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다.
"당신에게 선택을 다시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그녀에게 부탁받았던 일도 아닐 뿐더러, '예전의 당신'은 이미 한 번 절 거부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란 녀석도 어쩔 수 없네요, 하고 말을 끝맺은 소녀는 멋쩍게 웃어보였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소녀는 용케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당신을 원망했어요. 저 덕에 살았고, 저 덕에 세상을 느낀 당신이 어느새 제게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 당신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알 수 없는 말을 늘여놓던 소녀가 갑자기 내 눈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원망이나 분노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는 걸 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역시 모든 걸 알아차릴 수 있었죠. 으레 멍청하고 순진한 악당이 그렇듯, 전 완벽하게 이용당했다는 걸 아예 몰랐기에 처음으로 모든 걸 안 직후 충격과 허망함에 방황했어요. 당신이 그렇게라도 절 떠나야 했다는 것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당신에게 분노의 감정을 쏟아내던 제게 있어서 진실은 잔혹하리만치 명확했고, 제가 당신에게 어떠한 욕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또 다른 사실은 제게 뼈아픈 상처와 당신에 대한 미안함을 남겼죠. 이제야 할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리고 당신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모든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당신을 우연히 보게 된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소녀는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얼마간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소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했어요. 당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건, 오히려 저였어요."

 

 

 

"미안해요. 많이 당황스럽죠?"

소녀의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느라 반쯤 멍하니 소녀만 바라보고 있던 난, 한참을 더 있어서야 소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솔직히, 그래."

아직도 움직여지지 않는 머리를 어색하게 두어 번 끄덕이자, 소녀는 예상했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소녀의 표정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입은 마치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는 개처럼 고집스레 두 입술을 앙다물고 움직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몸을 서서히 일으키더니,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래도 전 앓던 이 빠진 기분이네요. 제가 가장 원했던 세 가지 소원 중 하나가 이제 막 이루어졌으니까요."

"소원…?"

나도 모르게 소녀를 따라 일어서려고 손에 무게중심을 두려다가, 손이 바닥을 통과하는 바람에 휘청했다. 이런, 그러고보니 여긴 바닥이 없었지.

 

"당신에게 제 진심을 전하는 것, 당신이 '잊혀진 당신'이라 부르는 당신 속의 당신에게 용서받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돌리는 것."

소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잊혀진 나'라는 건, 지워진 기억의 주인공이었던 나 자신을 부르는 나 혼자만의 암호였으니까. 분명 이 사실은 희진에게도 알리지 않은, 나만의 비밀이었을텐데…?

"아, 놀라실 필요 없어요. 저와 당신은 이 공간 속에 기억이 공유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 작게 웃어보였다. 처음으로 본 소녀의 '웃음'.

"물론 제 기억이 당신에게 흘러가지 않도록 했으니, 당신이 갑작스러운 과거와의 조우로 혼란스러워 할 필요도 없겠죠."

소녀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몸을 빙글 돌려 텅 빈 공간을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잘못으로 시작되었어요. 전 반드시 그걸 막을 거고요."

그렇게 말을 끝맺은 소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빙긋 웃어보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올라간 소녀의 입꼬리가 확실하게 보였다.


"그─── 내가 했던 '선택'이라는 거, 말인데."
과거의 나에 대해 물어야 할까 말까 고심하며 머뭇머뭇 운을 뗀 입이, 두려움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소녀를 만나면서 간과하고 지나가버린 무언가를,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이제서야 눈치챈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내 평범했던 일상들은 모두 무너져버리고 만다'는 사실. 일상, 내가 기억을 잃은 후로부터 서서히 쌓아왔던 모든 추억들. 그 모든 것들은, 기억을 되찾았다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단숨에 색을 잃고, 망가지고, 찢어져 한 줌의 재로 사라져버릴 것이란 걸 난 어느새 눈치채고 있었다. 잊혀진 나는 너무나도 큰 괴리감의 벽으로 가려져 있었고, 그랬기에 현재의 나조차도 나'였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그 기억들을 되찾는 것이 두려워서, 그 기억 속에 담겨있는 모든 '이질감'들이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생겨난 수많은 혐오의 막으로 가려놓은 채 눈앞에 있는 현실로 도피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내가 이 모든 막들을 단숨에 걷어내고 잊혀진 나를, 조금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면, 지금까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거리면서도 조금이나마 날 지켜주었던 현실로부터 받은 마음의 안식들은 모두 한순간에 훅 꺼져버릴 것이 뻔했다.
 
"그거,"
숨을 내뱉듯 말했을 텐데,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눈치챌 정도로 심히 떨리고 있었다. 그새를 못 참고 두려움이 강해진 걸까. 양손 역시 내면의 두려움을 겉으로 표출하듯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증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의 발발. 이 '증상'이란 놈이, 나도 모르는 사이 잊혀진 나와 내 사이를 갈라놓는 혐오의 막을 걷으려 할 때마다 - 즉, '이질감'을 이해하려 할 때마다 - 어김없이 나타나는 일종의 경고라는 것을, 난 '그 날'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 아마 그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잊혀진 나를─ 이질감을 두려워하고, 정도를 넘어 내 안의 이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단순한 요소인 판타지마저도 혐오하고 멀리하게 된 건.
 
"──────아니, 아무것도 아냐."
다른 사람의 소리로 착각할 정도로 내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소녀의 말대로라면 분명 소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지.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어 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내겐 내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용기가 아직 부족했다. 지금까지 소중히 지켜온 일상을 한 번에 뒤집어버릴 만큼의 각오가 없기도 할 뿐더러, 그 일상에서 가까스로 얻은 안식을 쉽게 놓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난 역시 '겁쟁이'였다. 잊혀진 나를 대면할 기회를 져버린, 다시 '그 날'의 실수를 반복하는 겁쟁이. 눈 앞의 소녀가 '그 날'처럼, 잔인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중요한 것을 눈앞에서 놓아버리는 지금의 나는 완벽한,

 

겁쟁이였다.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없이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 profile
    코인천국 2013.12.04 14:30
    글을 쓰신지가 오래 되었군요ㅋㅋ 미쳐확인하지 못해 방금 봤네요 또 언제 올리실지 모르지만 계속 기대 하겠습니다^^
  • ?
    개소실 2014.03.19 05:28
    음, 돌아왔습니다.

    현재 '판중모'는 아직 전체적인 시놉시스가 불안정하다는 평이 많아 더 꼼꼼한 '완성작'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수련 중입니다. 대신 요즘 새로운 장르를 시도한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쓰는 중인 백앵화로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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