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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부친이 이상해졌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을 정도로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내게 '거지새끼', '엄마 없는 놈' 등의 모욕적인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뱉어내는 쓰레기들을 하교 시간에 뒷골목에서 실컷 두들겨 주는 등 잔머리도 잘 굴렸다.
이 험한 세상에선 정석보다는 야비한 방식을 배우는 게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어렸을 적의 나는 소름돋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가장 간편하고 효과적이며 비열한 방식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해내는 일쯤은 내게 있어 발장난이나 다름없었을 정도로 간단했다.
그래서 난 아주 간단히 눈치챌 수 있었다.
부친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서서히 복권과 술에 미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곧 괜찮아질 거야, 윤아. 이 놈만 당첨되면 말이지……."

부친은 썩은내가 넘치는 더러운 입을 내 앞에 들이밀며 그렇게 지껄였다.
부드럽고 중후했던 목소리는 갈라지고 가래 낀 소리로 뒤바뀌어 있었고,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심각했던 술 냄새는 어렸을 적 그토록 따랐던 부친의 옛 모습마저 지워버렸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물론 부친이야 홀로 어머니의 죽음, 남겨진 빚들을 감당해내기엔 맨정신으로 있기가 힘들 수도 있었을 테지만, 자식이 있음에도 '극단적인 현실 도피'라는 최악의 패를 내밀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친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자 죄였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여튼 그 시점부터 나는 부친을 아버지라 생각하길 포기했고,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해 조금만큼의 도움도 되지 않는 종이 조각만을 싸들고 돌아오는 부친을 볼 때마다 환멸감을 가득 담아 노려봐 주었다.
물론, 그렇게 할 때마다 싸가지 없다는 욕을 들으며 얻어맞았지만.
망가진 사람을 보며 자란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피폐해져만 갔고,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살 이유도 없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듯한 날이 몇 달간 지속되었을 즈음, '우리의 집'이라 부르기조차 힘들어진 부친의 주택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그 때서야, 내게도 '삶의 이유'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생길 수 있었다.



"──────아우."

하품을 얼마나 크게 한 건지, 코가 다 찡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딴짓을 하는 녀석들, 칠판에 눈이 고정되어 있는 녀석들, 아예 엎어져서 취침 중인 녀석들, 무언가를 노트에 끄적이는 녀석들 등 다양한 모습들이 보인다.

'역시나…….'

언제나처럼 지겨운 하루다.
긴장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하루, 소리만 내지 않으면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 하루.
학교라는 곳에서 보내는 하루라는 녀석은 사람을 지겨운 생각만 들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작가의 심리를 그대로 보이고 있는 행이 있는데, 이건 시험에 별로 나오지도 않을 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의미없는 수업 내용보다도 더 의미없는 선생의 말이 들려온다.
'시험에 안 나오니 신경 꺼라'라니.
이게 무슨 교육이야, 나라가 원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사육이지.
책상에 엎드린 채 기지개를 쭉 켜다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선생의 잠을 부르는 나긋한 강의 소리를 들으며 ,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 만… … …을 ……요.]

그래, 다시 만날 수 있어.

[……가, …상… …… …에… ……, ……히.]

사랑하는 상대끼리의 만남에 있어 '우연'이라는 건 없어, ────아. 그런 것들을 연인들은 '인연'이라고 하니까.

[……, ……도. …… ……의 '인…'… ……로… …… ……지… …을 ……….]

그들이 그렇게 말해주던가?

[…… 않…… … … 있……. …신… ……… 보… …… 생…… …는 …….]

────아…….

[……… 슬… …… …지 ……요. ……… 않……, …려 ……… …기… … … 있… ……도 …… ……니…….]

…….

['죄책감' …… 것 ……요. …… ……처…, ……게……. 서… ………고 ……… ……아…?]

미안, 미안해…….

[불…… …람. '죄책감'… 사…… ……… 독… …이……. …… ………를 …생…… ………는…….]



"────윤? 야, 이윤!"

"─────!"

희미하게 들려오기만 하던 소리가 갑자기 또렷하게 귓가에 들려와, 흠칫 놀라며 잠에서 깬다.

"응? 뭐야, 너 울었냐?"

아직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실장의 목소리가 녀석들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똑바로 들려온다.

"울었다고?"

목이 완전히 잠겨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기괴한 소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한 번 더 놀란다.
게다가 눈 밑을 살짝 만져보니, 정말로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무슨 꿈을 꿨길래, 나는 울고 있었지?

"참나, 꿈 속에서 대체 뭘 했길래 질질 짜? 체육 시간이야."

자기 할 말만 하고 뒷문에서 기다리던 녀석들과 함께 사라지는 실장.
손등으로 대충 눈을 훔치고, 기지개를 크게 켠다.
교실 안에 나밖에 남지 않은 걸 보니, 아무도 안 깨워주니 실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직접 행차라도 하셨나보다.
거 참, 자상하기도 하시지.

"……가야지."

머리를 긁적이며 괜시리 중얼거려본다.
어차피 나 하나쯤은 없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테지만, 체육 선생이 짜증날 정도로 히스테리를 심하게 부리니 말이지.

'그보다, 이상하게 꿈에서 들은 '죄책감'이란 말이 자꾸 기억에 남네.'

신기한 일이다.
꿈 같은 걸 꾸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이번만큼은 단어 하나뿐이지만 확실히 기억나는 게 있으니 말이다.
눈물을 흘리게 만든 꿈 속에서 들은 '죄책감', 이라.

'그것만 가지고 뭘 어떻게 알아.'

고개를 살짝 흔드는 걸로 생각을 애써 떨쳐내고,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체육복을 꺼낸다.
죄책감?
몰라.
그딴 거, 알 게 뭐람.



"또 늦었냐, 윤. 오늘은 오래달리기라 너도 참여해야 한다고 저번에 말했잖냐."

말했으면 뭐 합니까, 그 때 보건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네. 죄송합니다."

…같은 말은 감히 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조아린다.
이 체육 선생, 겉보기엔 꽤 퉁퉁해 보이는데 실상은 무시무시한 살인 병기란 말이지.
섣불리 입을 놀려대다간 말 그대로 '산 채로 사형당하는'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는 게 나를 포함한 전학생의 평가다.
괜히 '살색 헐크' 같은 별명이 붙은 게 아니란 말씀.

"쯧, 뭐 됐어. 저번에 50m 달리기 기록 못 잰 것부터 재야 되니까 따라와. 체육부장, 기록 잘 받아적어. 체육부부장, 넌 그 스톱워치서 손 떼는 순간 죽는다."

오래달리기를 해야 하는 다른 학생들의 기록 작성은 부·차장에게 떠넘기고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체육 선생.

"부부장, 이란 말보다는 차장이란 말이 더 낫지 않나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지만,

"뭐, 나 무식하다 이거냐?"

"아닙니다."

역시 깔끔하게 기각당하고 말았다.
그보다, 달리기───인가.
…귀찮은데, 역시.



"6초 44!"

여유다.
좀 더 빨리 뛸 수도 있었지만, 그러다가 세계 기록이라도 갱신하면 조금 귀찮아질 테니까.

"너, 전에도 물어봤지만 진짜 이 길로 쭉 갈 생각 없냐? 시각장애우가 평균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건 진짜 대단한 건데."

언제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 트랙의 끝에 서 있던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으며 선생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온다.

"생각하고는…… 허억, 있어요."

당신처럼 진지하게는 아니지만, 이라는 말은 고스란히 삼키며, 일부러 숨을 거칠게 쉬는 척한다.
상당히 흥분한 표정의 선생을 보니, 말을 잘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 진짜 넌 내 인생 최대의 대박이다. 결심하자마자 튀어와, 바로 트레이닝 시작할 테니까."

그렇게 내 어깨를 마구 흔들어대며 혼자 실컷 떠들어대더니, 다른 녀석들의 기록을 확인해야겠다며 조회대를 향해 곧장 달려가는 선생.

"하다못해 구석으로 돌아가시지요. 달리던 애들 식겁하잖습니까."

내 말은 듣는 척도 않고 말이다.
여하튼 선생도 다른 녀석들 기록을 신경쓰느라 바쁜 것 같고, 오래달리기는 아무래도 나중에 해야 할 듯하다.
차라리 오래달리기를 같이 하고 50m 기록을 나중에 했으면 또 나중으로 미룰 일도 없었을 텐데.
바보 맞네, 선생.

'뭐, 나랑은 상관 없어.'

어차피 다른 종목은 제대로 하지도 못 한다.
그냥 수행평가 연습할 시간에 달리면 될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기지개를 켜는 순간────

[알고 싶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 profile
    Just 2014.04.27 07:46
    형 카페좀 살리시라구요 8ㅁ8
    시험 끝나시고 한가하실 때, 저 출판준비좀 도와주십셔.번역작업 하시던 짬밥좀 불쌍한 후배에게 던져주십사...
    글고 조만간 강좌 하나 올릴까 하는데 그것도 도와주시져.
    그냥 다 도와주시져.
  • ?
    개소실 2014.04.27 08:07
    내 시간을 쪼개 네게 넘기라고?!
    거! 절! 한! 다!

    ...뭐, 시간 남음 돕겠지만 기대는 마라...
  • profile
    Just 2014.04.27 08:08
    겁나 기대하고있습니다. 기대에 부응하세요.
  • ?
    개소실 2014.04.27 08:08
    ...저런.

    것보다 폰 고장나서 카톡을 못하는데 어쩌냐. 돕지도 못 하고.
  • profile
    Just 2014.04.27 08:09
    컴챗
  • ?
    개소실 2014.04.27 08:10
    그래...
  • profile
    Octa 2014.04.27 09:04
    카페라뇨, 무슨 카페가 있습니까...?!?!?!
  • ?
    개소실 2014.04.27 20:00
    있죠, 학교 카페가.
  • profile
    Octa 2014.04.28 01:09
    그나저나, 이 소설은 몇화정도까지 쓰실 것 같나요?
  • ?
    개소실 2014.04.28 03:06
    글쎄요...
    습작용으로 만든 거니, 또 중간에 끊길지도 모르죠.
    이거 쓰는 재미가 요새 쏠쏠데스요 ㅋ
  • profile
    Octa 2014.12.21 05:49
    ㅋㅋ 이거 예전에 써진 덧글보는것도 은근 추억이네요.. 어쨌든 오래된 얘기니까요..
    잘 보고 갑니다~
  • ?
    개소실 2014.12.22 05:40
    말 그대로 하루에 한 편씩 찍찍 싸대다 진지빨고 쓰려니까 하드하네요...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