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633 추천 수 0 댓글 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번뜩, 눈을 뜬다.
새까만 바탕에 핑크빛 해골이 그려진 천장의 패턴이 또렷하게 보인다.

'여긴…….'

모르는 곳이다.
아니, 모르는 곳일 터이다.
저렇게 센스도 뜬금도 없는 벽지를 천장에 바를 정도로 미적 감각이 모자라는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없으니까.

'그럼,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주위를 살짝 둘러본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가구 등이 보이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내가 누워있는 검은 색의 침대와 감히 가격을 매겨보는 것조차 두려운, 부드럽고 가벼운 연하늘색 이불뿐.
잠을 자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듯한, 삭막하다면 삭막한 방이다.

"으음……."

가만히 있는데도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운 것이, 무슨 약이라도 한 것 같다.
약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잘은 모르지만, 여하튼 느낌이 그렇다.
이유도 없이 아픈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당장 이유를 기억해내기엔 제정신이 아니니 답답하기만 하다.
답이 이어져 있는 객관식 문제를 접한 기분이랄까.

'이대로 한숨 더 자면 나아지……기는 개뿔. 바보도 아니고.'

흐릿한 머리는 쉽게 나아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주변의 환경은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럴 땐 일단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읏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드르륵, 드르륵.
무언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대체 누가, 왜 이 때 들어와서 이리 시끄럽게 구는 건지, 원───

"어윽."

명치가 무언가로 강하게 쑤셔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조금이나마 들렸던 머리가 다시 베개에 파묻히고, 정도를 지나친 아픔에 허리가 절로 굽어진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배로 가져가니, 단단하게 묶인 붕대의 꺼끌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다.

'왜, 배에 이런 게……?'

순간,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수많은 사진의 폭풍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머릿속을 정신없이 배회하는 사진들 하나하나가, 마치 옛 흑백필름이 돌아가듯 순서대로 내 눈앞을 휙휙 지나친다.
정체불명의 괴한, 코를 찌르는 악취, 날 찢어발기려는 커다란 '입', 배를 꿰뚫듯 강타하는 단단하고 검은 무언가───

"어, 깨셨네요?"

캄캄한 시야를 뚫고 들려오는, 쾌활한 소녀의 목소리.
그래, 이 목소리다.
이 목소리를 기절하기 직전에 들었던 것까지, 이제야 확실하게 기억났다.
사진의 폭풍이 사라진 머릿속이 꽤 맑아져 있음이 느껴진다.
폭풍이 지나가면서 뿌연 안개같던 무언가도 흩뜨리고 지나간 듯, 제법 또렷하게 사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너희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그렇기에, 가장 먼저 경계심을 가득 담아 물어본다.
이들의 의도는커녕 정체마저,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기에.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어오는 여자가 있질 않나, 겉보기만 인간같은 정체불명의 괴수를 철봉 하나로 막아제끼는 여자가 있질 않나.
그런 터무니없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어째서 나'같은 것'에게 도움을 요청하는지 도무지 의중을 헤아릴 수가 없다.

"음……. 그런 얘기는 저보다도 보스와 하시는 게 어떨까요? 전 간호 담당이라서요."

"처음 만났을 때는 '행동대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때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배의 붕대에 무슨 약물을 주사하는 장치가 없나 더듬어보며 반문한다.
한순간 황금빛 눈을 빛내는, 핑크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난다.

"우와! 기억해 주셨군요! 저, 이제 '이 곳'의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뮨 님께 기억된 사람이 되는 건가요? 정말 기뻐요!"

'행동대장'으로 기억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만큼이나 기뻐할 수 있다니, 정말 부러운 녀석이구만.
그보다, '이 곳'이라고?

"난 뮨이 아냐. 윤이다."

배에 장치가 없음을 확인한 후, 계속 누워 있었던 침대를 조사해보기 위해 두 팔로 몸을 지탱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허나 대답을 들어보기도 전에, 차갑고 축축한 감각이 어깨를 붙잡아 내리누른다.

"어허, 환자는 편히 쉬어야죠! 몸 혹사시키다 훅 가실지도 모른다고요?"

'말을 해도 꼭…….'

허나 소녀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기에, 조용히 속으로만 딴죽을 걸어본다.
슬쩍 등 뒤에 손을 넣어보아도 잡히는 것이라든지,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없으니 날 위협할 모종의 장치는 없다고 봐도 될 테지.

'일단, 지금 당장은 날 어떻게 할 생각이 없는 듯한데.'

태도나 겉으로 보이는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최소한 이 소녀나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온 건방진 여자나 내게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보였다.
계산된 움직임을 가능성으로 두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경계심을 푼 것처럼 연극을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차가워."

소녀의 물 묻은 손을 살짝 밀어내고 소녀의 말대로 다시 몸을 누인다.
푹신하고 따스한 감각이 맨살에 닿는 감촉이, 솔직히 말해 기분 좋다.

"그렇지, 조금만 있어보세요."

소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갑고 축축한, 소녀의 손과는 달리 묵직함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눈과 이마를 덮는다.
아마도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놓은 듯한데…….

"손이 젖어있던 건 이것 때문이었네."

"네. 보스가 정성들여 간호하라고 했으니까요."

찰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스───인가.
새삼스럽지만 내가 정말 '조직'의 아지트 비슷한 곳에 구금되어 있음을 실감나게 만드는 단어다.

"네 이름이 뭐였지?"

"메이엔이요. 풀네임은 따로 있지만, 그건 지금 당장 밝히지 말라는 명이 있었기에."

본명을 밝히면 안 된다, 인가.

"오케이. 메이엔, 이지? 나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몇 살이야?"

"'이 곳' 시간대로 치자면 16년쯤 되겠네요."

16년밖에 안 됐는데 나보다 조금 더 커 보인다니…….
나도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살짝 침울해진다.

"아까부터 계속 '이 곳'이라고 하는데, 외국인이라도 되는 거야?"

"아뇨, 무어라 설명하기에는 좀 그런데……. 그 쪽은 보스가 설명해 주실 거예요."

대답을 회피하는 메이엔.
'출신' 쪽에 대해서 설명하는 쪽은 보스다, 이 말이렷다…….

"───오케이, 고마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먼저 던져 대상의 성격을 파악하고 동시에 기타 잡다한 정보들을 얻는다.
책에서 읽은 심문 방법을 여기에서, 이런 방식으로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네. 뭐 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아니, 아직 이야기는 안 끝났다.
일어서려는 메이엔의 팔을 붙잡는다.
수건이 힘없이 다리 근처에 떨어지지만, 신경쓰지 않고 제일 묻고 싶었던 '진짜 질문'을 내뱉는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 내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온 건방진 여자도, 날 먹어치우려던 그 커다란 변태 자식도 전부 너희 소속이야?"

침묵.
긴장이 감도는 침묵이 공기를 무겁게 한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진 건지, 설마 지뢰를 밟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메이엔의 눈을 보고 있으면 대충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 테지만, 이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있고.
괜히 물어봤나 하는 생각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니,

"건방진 여자, 가 혹시 얀 이야기인 걸까요……? 아니면 보스?"

…생각하는 게 다 입으로 나오잖아, 얘.

"그냥 뇌에 간접적으로 간섭이 가능한 여자가 있는지 알려줘. 하다못해 그 변태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만 알려주든지."

질문을 수정해주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는 메이엔.

"뇌에 간섭한다……는 게 머리로 대화하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있어요. 두 분 정도? 두 분 다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라, 이따 직접 만나보시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것 같네요. 그리고 커다란 변태 자식이 뮨 님이 만나신 '페이담'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는 아군도 적도 아니'었'어요. 기껏 초대한 특별손님의 앞길을 막고 한바탕 난리를 일으켰으니 이젠 적으로 봐야겠죠."

"……알았어. 고마워."

고개를 숙이고 빙긋 웃어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메이엔이 수건을 집어든다.
찰방, 찰방.
다시 들려오는 물소리, 다시 눈을 덮는 묵직하고 차가운 감각.

"엇, 차."

드르륵, 드르륵.
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메이엔이 처음에 냈던 소리와 완벽히 똑같은 소리가.

"이왕이면 물통 같은 건 들고 가는 게 낫지 않아?"

"안 돼요! 바닥에 물 흘리면 또 윗분께 혼난다구요."

…솔직히 조금은 예상했지만, 덜렁거리는 바보구나, 저 애.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실내.
자, 이제 메이엔도 갔겠다, 대충 생각을 정리해보자.

'먼저 첫째, 현재 내 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붕대가 깨끗하니 적어도 피가 흘러나올 정도의 치명상은 아닌 듯하지만, 명치의 욱신거림이 꽤 심각함을 빌어 생각해보면 적어도 피멍, 그 이상의 흉터가 있을 터.
설령 복부의 이상이 아니더라도, 처음 일어났을 때의 그 흐리멍텅했던 머릿속을 생각해보면 무언가 약물 같은 것을 처방당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쳐도 그렇지, 머릿속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생각을 하려 해도 생각이 강제로 흩어지는 불쾌함은 웬만한 전기 충격을 당해도 생기지 않는 부류의 감각이었다.
지금이야 괜찮긴 하지만, 언제 재발한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이니만큼 어느 정도 경계할 필요는 있을 터.
정리해 보자면 지금의 나는 육체적으로, 어쩌면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
언제 다시 정신이 흐리멍텅해질 수도 있으니 만전에 주의를 가하자, 정도로 결론을 내려본다.

'둘째, 나를 '초대'하려는 부류와 나를 '제거'하려는 부류, 이 둘은 모두 나를 알고 있다. 아마 정말로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이라면,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그 둘을 모두 알고 있었을 터.'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처음엔 들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두통과 함께 보았던─ 겪은 적은커녕 본 적조차 없었을, 허나 완전히 부정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던 기억 속의 광경들, 그리고 '기억을 잃었다'고 당당히 말했던 여자와 나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율자'라고 부르며 적대했던 거한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기억 속의 나'는 이미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크게 관여되어 있으며,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즉,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였다는 말이 된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아니, 아니야. 난 어딜 봐도 정상인이잖아.'

그래, 무엇보다 그들은 몸 자체가 괴상한 생물체이거나(괴한) 인간의 한계를 가벼이 뛰어넘는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메이엔) 말이지.
……아니,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뭐 어때.
벌써 비정상적인 일에 말려들어 버렸는데.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고, 다시 생각을 계속한다.

'여하튼, 결론부터 내려보자면 난 지금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게 쫓기는 중이고, 날 초대한 이 조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굳이 덧붙이자면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인연을 맺은 건지─ 어떻게 인간도 아닌 무언가조차 날 알고 적대하는 건지 단 1g도 떠올릴 수 없는 나지만, 그런 나를 '초대'한 쪽은 굳이 기억을 잃기 전이 아니더라도 나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듯하다.
나를 불러냈던 여자는 이미 내가 '기억이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이 이상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고로 간단히 정리해보면, 나는 기억을 잃기 전의 내 행보 덕에 정체불명의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며, 그런 나를 필요로 하는 여기의 사람들은 내게 호의적이니 이들에게 협조적으로 굴며 조금씩 정보를 모으는 편이 훨씬 안전할 듯하다, 는 결론이 나온다.

'……좋아, 이 정도면 대충 마음의 준비는 끝난 것 같군.'

다시금 생각을 정리하고, 심호흡을 하며 다음 '호출'을 기다린다.
자,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
어디 한 번 재미있는 다과회 한 번 벌여보자고, 보스 나으리.
알고 계시는 건 모조리 털어놓아 주셔야겠어!

  • ?
    Calinargo 2014.05.05 02:51
    길군요!
  • ?
    개소실 2014.05.05 03:40
    하루에 한 편씩 이 분량 찍찍 싸내는 중임여 ㅇㅅㅇ
  • ?
    Calinargo 2014.05.06 20:35
    순순히 저에게 분량찍는 비법을 털어놓으시죠!!ㅋㅋ
  • ?
    개소실 2014.05.07 02:49
    쉽습니다.
    쓰고 싶은 만큼, 쓸 만큼 쓴다.
    분량을 따지는 것만큼 멍청한 작가는 없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해야지, 괜한 경쟁심리에 마음에도 없는 분량 늘리려다가는 시망합니다 ㅠ
  • ?
    Calinargo 2014.05.09 08:13
    아음...? 아니 쓰고 싶은만큼이 안써지는데요..ㅠㅠ
  • ?
    개소실 2014.05.10 10:08
    음... 그건 역시 저로서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요 ㅠ
    전 이쪽 방면으로 나가는 녀석이니까 이렇게라도 찍어내야 하지만...
  • profile
    Octa 2014.05.05 03:59
    하핳~!! 재밌다~
  • ?
    개소실 2014.05.05 08:55
    정말 이 비루한 노답 습작을 한 편 한 편 보시며 재밌다고 느끼신 것이라면, 마음 속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하겠습니다!
  • profile
    Octa 2014.05.05 20:18
    근데 문제는 이게 스룻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소설이라는것이지요...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