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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님."

머리가 자꾸만 헛돈다.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라고, 끊임없이 머릿속은 의문만을 뱉어낸다.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다.
확실히 지금의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배신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니까.
단지, 허탈한 기분이 들 뿐이다.
누님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의 포섭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는 매개체일 뿐.
허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뿐일 것이라는 망상이, 정말이지 죽고 싶을 정도의 허탈함을 불러일으킨다.

"알아, 조금 혼란스럽겠지. 계속 그렇게 누워서 대화하기엔 좀 그럴 테니까 자리를 옮길 건데, 괜찮지?"

찡끗, 윙크를 해보이는 누님.
대답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는 여인 둘이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자, 가자."

그녀들이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확인할 틈도 없이 누님의 손에 이끌려 복도로 걸음을 옮긴다.
반짝이는 백옥빛 대리석 바닥에 금색 자수가 놓인 천장의 붉은 벽지, 더러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백색의 벽이 나를 반긴다.

"이제 몸은 완전히 나은 것 같네."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을 걸어오는 누님의 뒤를 가만히 따라간다.
통로가 꽤나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조금만이라도 길을 잘못 들면 누구라도 미아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길을, 아무런 생각도 않고 그저 걷는다.

"네."

"하도 간청을 해대길래 별 수 없이 대타로 내보내긴 했지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건강히 지내줘서 고마워."

"네."

솔직히 무슨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이제와서 그런 것 따져봐야 뭐 어떤가 싶지만.
어찌되었건 결론은 하나뿐일 것이 뻔하다.
'우리에게 협력해라' 식의 말을 들을 테고, 나는 그 반강제적인 제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테지.
그렇게 되면 나는 결국 누님과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만큼이나 단순하고 한심했던 나를 잊을 정도로 궃은 온갖 일에 이용당하고, 결국 허무하게 연이의 뒤를 따를 테지.
누님이 가르쳐 주었던 '책임'은커녕,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인형처럼 남의 손에 의해 놀려지고 망가지다 다시 버려지겠지.

"왜 그렇게 말투가 딱딱해? 혹시 이제 와서 긴장이라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있다.
누님의 말이 중간에 끊겼지만, 눈앞이 흐려져 있기에 누님이 왜 말을 끊었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무심코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보니,
주륵.
따뜻한 물방을이 손가락을 추진제로 삼아 턱밑으로 달려 내려간다.

'눈물……, 인가?'

왜 울고 있지, 나는?
이미 충분히 허탈해하고 있지 않았나?
이미 충분히 체념하고 있지 않았나?
이미 충분히,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가?



[망할 여자, 하필이면 이런 때에 애라니! 뒤져서도 사람을 엿먹이다니!]

부친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에게도 온갖 욕을 지껄이며 병을 기울였다.
우거지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망가지고 뒤틀린 면상, 종종 물건을 집어던지는 포악한 성격, 주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제멋대로의 이기주의자.
이미 옛날의 부친은, 고집 없고 눈물 많았던 따스한 아버지의 상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혼자 중얼거리며 텅 빈 술병을 보고 있는 부친 몰래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곱게 빗어진 머리, 향긋한 샴푸의 냄새,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쌍꺼풀 있는 눈.
그 눈이, 공포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괜찮아."

그래서 말해주었다.
아이가 안심할 수 있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말해주고 나서야 아이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내가 힘내야 해,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절대로 울면 안 돼.
나는───── 이 아이의 오빠니까.
나보다도 약하고, 나보다도 험한 꼴을 당할 지도 모르는 아이의 유일한 방패니까.



"왜 그래?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먼지라도 들어간 거야?"

걱정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의 누님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다.
어차피 누님은 내게 어떤 감정도 없을 거야.
저 말도 저 표정도, 모두 거짓일 거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물을 훔친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보다 이야기는 언제 하는 거죠?"

주의를 돌리려고 한 질문이긴 하지만, 걷기만 하고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있으니 잡념이 나를 괴롭힌다.
어서 진실을 알려주었으면 한다.
어서 빌어먹을 진실을 전해주고, 이 끝없는 희망고문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바란다.

"……언제나 그렇게, 혼자 괴로워하기만 할 거야?"

"……?"

아주 조그맣게,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똑똑히 들어버린 누님의 말.
무슨 말인가 싶어 돌아보지만, 얼굴을 마주보기도 전에 누님은 나를 휙 앞질러 간다.
그리고,

'누님?'

정말 한순간이었지만, 본 것 같다.
슬픈 표정의 누님을, 나를 처음 봤을 때 보았던 '동정심 섞인' 눈을 한 누님을.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런 눈으로 날 볼 이유가 없잖아요, 누님은.
단지 필요해서 함께 있어준 것뿐이었다면 그렇게 날 불쌍해하지 말라고요.
더 이상, 날 '사람'으로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라고요.
여동생의 몫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누군가의 도구가 되기 위함이었다면, 평생 그렇게 살다 버려질 테니까.
제발, 날 도구로만 바라봐 줘요.

"그렇게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 두려웠던 거야?"

──────누님의 말을 듣고서야 조금이나마 정신이 든다.

'나는, 내가 사랑받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누님은 나를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정황상 가장 그럴 듯한 상황을 갖다 붙여놓고 그대로 믿었을 뿐이지, 정작 실제로 누님이 그렇다고 수긍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괴롭히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내가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고?

"네가 그렇게 홀로 괴로워해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아."

누님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내 지금까지의 생각을 부정하는 말이, 귀를 뚫고 심장에 닿는다.
내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말이.
그럼에도 내 죄책감이 크고 강해서 애써 흘려보냈던 말이, 누님의 입을 통해 다시 돌아온다.

"여동생도 네가 그러기를 원하지 않을 거란 사실,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만족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떡하라고요."

혼자서 괴로워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고, 이 세상은 내게 말했다.
내가 힘이 없는, 단지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세상은 가르쳐줬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제가, 뭘 해야 한다는 건데요."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낙인, 빚쟁이라는 표식, 외눈이라는 저주가 나를 옥죄었다.
재기는커녕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 상황에서, 누님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었다.
날 '필요'하다고 할 날을 위한 포섭을 위해, 당근을 쥐어주며 '책임'을 가르친 누님이.
이제 와서 날 위로하려는 이유가 뭔지, 난 정말 모르겠다.

"여동생의 몫이라는 '책임'을 위해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사용되란 말이잖아요."

"…가서 말하려고 했지만, 지금 당장 말해야 할 것 같네."

누님이 갑자기 몸을 돌리는 바람에, 가슴에 얼굴을 묻은 꼴이 되고 만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항변하려는 찰나,

"너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네가 말한 그 '책임'이란 놈 때문이라고."

누님의 뜬금없는 말에, 다시 입이 굳고 만다.
  • profile
    공책상자 2014.05.11 07:19
    재밌네요오오오오!
  • ?
    개소실 2014.05.11 20:04
    폰 뺏겨서 하루종일 복구한 글입니다. 크흑 ㅠ
  • profile
    Octa 2014.05.12 00:52
    힘드셨겠어요...
  • ?
    개소실 2014.05.12 04:34
    어차피 연재 당일에 당일치기로 내는 거지만요 ㅋㅋㅋ
    역시 80% 전략! 정신적으로 대단합니다 ㅇㅅㅇ
  • profile
    Octa 2015.01.25 09:39
    후.. 전 글쓰는게 참 어렵던데..
    매주 꼬박꼬박 글을 써서 올리시는 소실님이 참 부럽네요..
  • ?
    개소실 2015.01.25 18:39
    시간이 남아도니 쓸 시간도 어찌저찌 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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