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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너에게 있어서는 기억에도 없는 책임을 강요하는 꼴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과적으로 네가 계획한 일이라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누님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난 별 생각도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였고.
그리고──── 누님의 모든 설명을 들어버린 지금.
난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누님이든 메이엔이든, 이 곳에서 활동하는 모든 멤버들──심지어 나도,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라는 사실을.



"책임…… 때문이요?"

"그래, 책임. 네 입으로 '속죄'니 '책임'이니 멋대로 말했으면서 나한테 다 떠넘겨 버렸잖아."

농담하는 투로 말했지만, 누님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속죄', 라.
어째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른 게 없는데.

"…죄송합니다. 옛날의 제가 민폐를 끼쳐버렸네요."

"응?"

내 사과에 누님이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괜시리 기가 죽었다.

"왜 그러세요? 뭐 잘못…… 했나요?"

조심스레 묻자 그제야 누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 슬퍼보이는 눈빛, 옅은 미소.
누님은 어째선지 그런 애매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약속 하나만 더 하자. '옛날의 나'라는 표현은 쓰지 말 것."

왜, 라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누님의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기에, 조용히 가슴에 묻어두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옛날이란 말만 빼면 무엇이든 상관 없어. 또 하나의 나라든지, 내 안의 나라든지. 사실 옛날이고 지금이고를 따질 차원의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뭐라고 부르든 괜찮을 거라 생각해."

누님은 아까의 슬퍼보이는 느낌은 온데간데 없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치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말해주듯, 난 괜찮다고 어필하듯.
그게 마치 자신을 채찍질하고 폄하하면서도 멀쩡한 척했던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무심코 내뱉을 뻔했다.
'대체 누님은 무슨 죄책감을 가지고 사시길래 그렇게 괜찮은 척을 하시는 건가요', 라고.

'잠깐.'

하지만, 그 전에 한 의문이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옛날과 지금을 따질 [차원의 존재]가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후의 나를 말하는 줄 알았기에 자연스럽게 '옛날의 나'라는 표현을 썼지만, 어째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했다.
갑작스레 나온 '차원'이란 단어, 그것이 가진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간단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니, 넘겨짚기는 그만두자.'

아직 제대로 된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조금 여유를 가진다고 해서 잘못될 것은 없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별 군소리 없이 조용히 누님의 뒤를 따랐다.
누님도 딱히 말을 걸어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에, 우리는 몇 분 동안 침묵 속에서 서로의 발소리만을 들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자, 다 왔어."

누님의 말에 멈춰서니, 과연 바로 앞에 지금까지 봐왔던 여타 문들과 별다를 것 없는 문이 하나 있었다.

"명색이 보스 룸의 입군데 이렇게 후줄근하다니, 확 깨는 느낌이네요."

걷는 동안 생각을 정리한 결과, 별다른 이득은 없었지만 가벼운 농담을 던질 정도로 마음이 안정됐다.
누님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잡이에 손을 댔다.

"다른 방보다 화려하면 이렇게 미로처럼 만든 보람도 제로가 되어버리니까. 트랩 설치의 3대 원칙 중 하나, 목표와 트랩은 분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트랩에도 원칙이 있었던가.
설치형 트랩 얘기하는 거겠지?
아니, 그보다 굳이 생각 안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
그렇게 속으로 딴죽을 걸며, 난 조용히 문을 연 누님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 우와."

솔직히 평가를 해보자면, 그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신비로움에 나도 모르게 빠져버렸다.
흔히들 말하던 SF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수많은 홀로그램 창이 오면(그렇다, 천장에 이어 바닥까지 포함한 것이다)에 가득 차 있고 정면에 자리한 초대형 스크린, 그 스크린을 빼곡히 채운 수많은 행성, 별, 혹성.
한낱 지구, 아니 태양계뿐만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를 전부 관리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스케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척 봐도 장난 아닌 작업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기계 아래를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많이 넓지? 이 곳만큼은 특별히 다른 방과는 다른 '처리'를 해뒀거든."

'커다란 기계'에서부터 눈치챈 것이었지만, 이 방만큼은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방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넓었다.
다른 방이라 해도 단순히 내가 누워 있었던 방과 주방뿐이었지만.

'다른 '처리', 인가…….'

조금 흥미가 생겼지만,

'방음이라든가 확장공사 쪽 이야기일 테지.'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하나하나 세세한 것까지 궁금증을 푸는 건 나중에 하면 되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즈음, 누님이 발을 앞으로 탁 내딛으며 양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어서 와, 우리의 '본거지'에."

"…그 포즈, 대사. 꼭 해 보고 싶어서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기분 탓이려나요?"

가볍게 딴죽을 걸면서도 이리저리 돌아가는 눈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일부러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이라서인지는 잘 몰랐지만 어두컴컴한 실내가 그 신비로움을 더 부각시키는 듯해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랄까, 마치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달까.
물론 내가 처한 상황을 금세 깨닫고 다시 자세를 고치긴 했지만.

"그럼 안 돼? 어차피 내 기지인걸.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그런 이기적인 마음가짐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보스는 사랑받지 못한다고요."

한 번 시작된 만담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가벼운 이야기가 끝나면 이제 중요한 무언가를, 지금까지의 삶을 한 번에 부정당할 만큼 굉장한 여파를 불러일으킬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 은연 중에 두려워졌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미 그런 사람이 보스가 되어있는 실태인걸."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누님은 양손을 부딪혀 소리를 냈다.

"자, 슬슬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마침 저기 오네."

"멋대로 시작하고 멋대로 끊는 농담인가요……."

거 참 편리하네, 라고 느긋하게 생각했던 나는,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아, 언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왔던 목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사실을.
뒤를 돌아보는 순간, 보고 싶어했던 누군가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연……아?"

내 입에서, 약속했던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부르지 못했던 사랑하는 여동생의 이름이 튀어나오리라는 사실조차도.
완벽히 연이와 똑같이 생긴 사람.
그 사람이 연이이면서 동시에 연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