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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하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렸을 적, 아무 것도 모르고 디뎠던 진흙탕에 완전히 발이 빠져버린 것처럼, 머릿속에 덜컥 제동이 걸린 듯했다.
이마에 생겨난 식은땀이 턱밑으로 주루룩 흘러내렸다.
싸한 느낌이 얼굴을 덮어, 등 뒤로 소름이 돋아옴이 절로 느껴졌다.
손끝이 저릿저릿해졌고, 발은 무릎 아래부터 벌벌 떨리고 있음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로 차게 굳었다.

[쿠후후. 하계의 버러지들은 약점도 참 많군. 두려움에 잠식당해 자신의 신체마저 제어해내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모습인지.]

비릿한 비소(誹笑, 비웃음)를 입에 머금은 채 천천히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
붉은 혀 끝에 조그마한 금빛 피어싱이 달랑이는 것이 수상하다, 는 느낌보다는 기괴함을 더 강하게 연상케 했다.
코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삭발한 민머리에 일자로 길게 찢어진 흉터, 오른쪽으로는 흉터를 가리려 한 듯 왼쪽으로 빗어넘긴 은빛의 긴 머리칼.
길거리에서 봤다면 머리스타일도 특이한 불량 중년일세, 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겠지만, 질질 흘러나오는 점액 사이의 번뜩이는 이빨은 그에 대한 지레짐작들을 간단히 부수고도 남을 정도의 혐오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페이……럼?"

이름은 확실히 외워뒀다.
잊을 리가 없었다.
날 죽이려던 녀석의 이름을, 나 본인이 잊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악취가, 안개처럼 뿌옇게 기억을 덮어버렸다.
악취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와 형태를 갖추고는 생각의 통로를 가로막기 시작한 것마냥, 뻣뻣하게 생각이 마비되는 불쾌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호오.]

거구의 사내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혀를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장난치다 의표를 찔린 뱀을 연상케 해, 나도 모르게 살짝 움츠러들고 말았다.
장난을 끝내겠다, 이제 진심으로 죽이겠다.
그렇게 속삭이는 듯한 환청마저 들리는 듯했다.

['그런 상태'임에도 용케 나의 닉네임을 기억해내다니, 조금 놀라운걸.]

약한 모습을 보인 덕인지는 몰라도, 심장을 멎게 하는 마술을 눈으로 걸기라도 하듯 잠시간 나를 노려보던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내게서 눈을 뗐다.

[어찌저찌해도 틀렸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말이지. 페이럼이 아닌 페이담이다. '붉은 눈(Pey)의 암수(暗獸, Damb)', 속칭 짐승의 정원. 부여받은 권능은 '기록', 네놈의 그 '영겁'을 다루는 것에 비하면 털끝만큼도 쓸모없는 저급한 권능이지만……. 뭐, 어차피 지금의 네놈을 고깃조각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테지.]

외려 머리의 흉터를 문지르며 묻지도 않은 정보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리기까지 하는 그의 행동, 말투는 하나하나가 방심이 깊게 배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내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암수라, 어둠의 짐승이다 이건가.'

속칭에 '권능', 즉 자신이 쓰는 무기의 정체를 알려줄 정도로 나는 얕보여지고 있다는 것일까.
여하튼, 내 목을 조여오듯 서서히 다가오는 페이담의 눈은 무언가에 집착하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부친의 눈, '그 때'의 부친의 눈을 정면에서 다시 마주치는 듯한 두려움이 더욱 몸을 얽매어 왔다.

'미치……겠네.'

[하하하! 그 눈! 그 눈을 보려고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아아, 최고로구나. 네놈의 같잖은 면상이 겁에 질려 일그러진 모습이, 추악한 것을 보는 듯하던 눈깔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새파란 빛을 띠는 지금의 순간이!]

혀를 주욱 늘어뜨리며 큰 소리로 웃는 페이담.
주르르르, 복부의 점액과 붉은 혀 끝으로부터 흘러나온 침이 만나 코앞에서 기괴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나는 보고도 어떤 짓도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손을 놀려 뒷걸음질친다는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전신이 돌이라도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윽……!"

[자, 이제 말해보거라. 네가 진정으로 겁내고 무서워해 벌벌 떨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 네가 마지막으로 볼, 너의 숨통을 끊어줄 자가 누구인지 말이야!]

흉터를 매만지며 그렇게 말한 페이담이 갑자기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붉은 눈, 찢어진 푸른 빛의 흉터, 곧장이라도 찢어발길 듯 쩌억 벌어지는 복부의 입,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대체 왜?'

나는 왜 이제 와서야, 이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공포를 느끼고 있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수많은 생각들이 막힌 댐이 뚫린 것마냥 쏟아져 나왔다.
가정, 추리, 확신, 의심, 재고, 회고, 대입, 조합.
모든 것들이 아무렇게나 흩뜨려놓은 물건들처럼 여기저기 널브려졌다가 멋대로 정리되어갔다.
머릿속을 뒤흔드는 혼란, 이후 느껴지는 묘한 해방감, 그와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문.

눈앞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페이담의 얼굴마저 흐릿해질 무렵.
문득, 숨을 쉬고 싶다는 본능이 뇌를 찌르듯 자극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숨을 쉬는 것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크흐, 허억."

급하게 숨을 들이키자, 일순간 머릿속이 흐려졌다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나의 머릿속을 쥐고 흔드는 느낌, 그 불쾌한 감각이 순간이지만 다시 나를 괴롭히려 했던 것이다.

'분명, 이 현상에는 저 자식의 손길이 닿아 있어.'

한 번 확신이 들자, 영영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페이담의 공략이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코앞의 불부터 꺼보자.'

당장에 공략이 가능한 '사고의 마비', 이 귀찮은 방해 요소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부터가 페이담 공략의 시작.
그러려면 먼저 그 방해 요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머릿속이 흐려지는 순간과 맑아지는 순간, 이 두 순간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라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려야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작금의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매개체라 할 법한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숨을 한동안 쉬지 않다가, 조금씩 들이마셨다.
악취가 코에 남아있는 동안은 머릿속에 이물질이 들어오는 듯한 이질감이, 악취가 사라진 후에는 생각의 길을 가로막던 벽이 뚫린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즉───

'설마 악취가 일종의 신경독소(神經毒素, 생체의 여러 조직이나 기관에 작용하는 독물 중에서 특히 신경계에 특이적으로 작용하는 독소물질. 신경독소에는 결정된 표적기관이 있고 부위별로 특이적으로 결합하여 정확하게 독작용이 발휘되도록 조직되어 있다{출처 : 생명과학대사전})였던 건가……?'

정신계를 마비시키는 신경독.
그 외에 달리 이 증상을 납득시킬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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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ta 2015.02.23 09:03
    으으.. 묘사된걸 상상하는것만으로도 꽤 끔찍하군요..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