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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염병할. 안 그래도 좆같은 날에…….”
파란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진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허옇게 센, 허나 아직도 풍성하게 자리한 머리털을 거칠게 털어내며 노인은 중얼거렸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안 그래도 먹먹한 노인의 귓속을 따갑게 찔러대는 듯했다. 해수욕장이 만원이라며 떨어대는 호들갑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8월 중순이었건만, 노인의 표정은 마냥 찌푸려진 채였다. 해수욕이 노인의 형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치라는 사실 역시 노인의 불쾌지수를 높이는 데 한몫하는 요소였지만, 이 날이 둘째 주 목요일, 폐지가 모이지 않는 날이라는 사실이 노인에게 있어 어떤 희소식도 무색케 만드는 흉문(凶聞)이었음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아무리 고생을 해 보아도 쌓이는 건 허리의 지긋한 통증뿐인 날. 노인은 이 날을 거의 혐오하다시피 했다.
“아주 사람 허리를 끊어먹으려고 작정을 하지, 이 씨부럴 것.”
욕이 진득하게 섞인 가래침을 뱉어내며 노인은 계속 중얼거렸다. 하늘을 뿌옇게 덮은 물안개가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나돌아 다니더니만 이번에도 아주 공치고 말았구나, 하며 놀리는 듯해 더욱 짜증이 치솟았다.

이런 날에는 담배 한 개비가 절실한 노인이었다. 둘째 아들놈이 선물이라며 십여 년 전에 사 주었던, 삐뚤빼뚤한 바느질선이 그대로 보이는 얼룩덜룩한 색깔의 면 티와 누렇게 변색되고 여기저기 구멍이 난 바지 하나. 어디에도 담배는커녕 동전 하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윗주머니 부근을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리 엿만 주구장창 먹이는 세상이라도 이 정도의 보상은 괜찮지 않겠느냐는 심히 자기위로적인 생각에서 나온 행위였으나, 담뱃갑의 두터운 감촉은 당연히 없었고 손에 찐득하게 묻어 있던 흙먼지가 남긴 새로운 얼룩만이 노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에잉.”
바지 주머니에서도 기름 없는 일회용 라이터밖에 찾지 못한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내팽개쳤다. 흙탕물에 빠져 맥없이 밑바닥으로 잠기는 라이터의 노란 몸통을 바라보던 노인은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까짓 담배 한 개비, 없어도 한숨을 쉬는 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제는 하늘도 쉬라고 사정을 하는구먼. 에잉, 쯔쯔…….”
한 번 터져 나온 한숨은 씁쓸한 혼잣말로 이어졌다. 폐지 줍는 일 따위 다 접고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유혹이 아무리 마음을 흔들어도 나 편하자고 아랫놈들 걱정 시켜서야 되겠느냐는 고집 하나만 가지고 자식들에게 손 한 번 벌린 적 없이 꿋꿋하게 버텨온 노인이었다. 허나 평생을 돌보아 드리겠다며 살갑게 대하던 자식들도 홀연 연락이 끊기지를 않나, 몸은 점점 약해져만 가지를 않나. 유일한 소일거리였던 폐지 줍기조차도 벌이가 영 신통치 않아 점점 홀로 버티기가 힘에 부치던 참이었다.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인 집 한 채도 재개발이니 뭐니 하는 괴물들에게 먹힐 것이란 소문을 몇 달 전부터 계속 들어온 노인에게 있어 실정은 그야말로 참담 그 자체였다.

“이놈의 새끼도 이제 고물상에 팔아버리든가 해야지.”
착잡한 마음에 괜히 옆에 세워둔 수레를 발로 툭툭 건드리자, 수레가 불길한 쇳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렸다. 노인이 급하게 수레를 붙잡아보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수레는 옆으로 쓰러지며 얼마 없던 내용물마저 흙탕물에 쏟아내고 말았다. 당황한 노인이 수레라도 세워 보니, 역시 붉게 녹이 슬어 있던 받침대가 완전히 끊어져 제멋대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으나, 애꿎은 수레를 욕할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노인은 쑤시는 허리를 애써 놀려 폐지들이 쏟아진 흙탕물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도 꼭 무언가 일이 나기만 하면 적어도 한 마디는 내뱉어야지 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노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런…….”
염병할 놈의 고철덩어리 같으니라고. 노인은 그렇게 투덜대려던 참이었다.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라면 박스를 집어 드는 순간, 고개를 든 노인의 시야에 조그마한 그림자가 닿지만 않았더라도 그 투덜거림은 완전히 끝을 맺을 수 있었을 터였다.
“하, 부우우!”
먹먹하게 귀를 때리는 빗소리의 틈새로 아이의 목소리가 노인의 귀에 뚜렷하게 들려왔다. 노인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어눌한 말투, 늘어지는 말끝, 무릎께에 살짝 걸치는 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아이는, 적어도 노인의 기억 속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아가?”
그림자를 향해 크게 외치며, 노인은 벌떡 일어났다. ‘하부’라는 괴이한 단어를 쓰는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미숙아 판정을 받았다는 첫째의 손자뿐이었기에, 노인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손자가 왔다는 사실은 곧 소식이 끊긴 첫째의 기별이 코앞에 당도했다는 뜻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그간의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느 방면에서 생각해 보든 손자의 존재는 노인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고, 이를 뒷받침해주듯 노인의 표정은 어느 샌가 퍽 밝아져 있었다.
“하부! 하부!”
손자의 활기찬 목소리가 노인의 입에 미소를 피워냈다. 하루빨리 손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하루빨리 손자의 조그만 손아귀에 손가락을 쥐여 주고, 젖비린내가 미약하게 남은 머리의 냄새를 맡고,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오고 있을 첫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오오냐, 아가! 지금 간다!”
허리의 통증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림자를 향해, 노인은 마주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져 그림자를 더 짙게 드리웠고, 아무리 가까워져도 도통 얼굴이 보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노인의 마음도 점점 착잡해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손자는 할아버지를 놀리기라도 하듯 바로 자기가 왔던 길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하부!”
손자의 목소리는 도통 작아지질 않건만, 손자의 그림자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저리는 다리를 놀렸다.
“아가! 어딜 가니! 할애비 여기 있다!”
왜 자기를 피하는 것인지, 노인은 손자의 장난기가 이번만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목소리 한 번 들려준 적이 없었으면서, 눈앞에서까지 그렇게 할아버지의 애간장을 녹여야겠느냐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부! 하부!”
“아가! 제발, 아가!”
얼마나 빗속을 뛰었을까,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 같았던 아이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노인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당황한 노인이 급히 몸을 세우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발밑의 돌덩이에 발이 걸린 노인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이내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린 구덩이에 허무하게 처박히고 만 것이다. 번쩍, 번쩍. 노인의 눈에 수많은 빛이 점멸했다. 빛은 곧 캄캄한 암흑을 불러왔고, 그 위로 묵직한 빗방울의 소란이 찾아왔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멍청한 노인네라고 비웃듯 하는 빗방울들의 수다를 가만히 들으며, 노인은 점점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을 생각도 않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허무한 일생의 마무리였지만, 마지막이니만큼 즐거운 술래잡기를 도와준 손자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결국 가셨네. 쯧쯧.”
“그러게 말이에요. 어쩜, 이리도 허무할까.”
“허무하기로는 저 집안 사정만큼 허무한 것도 없지요.”
“집안이요?”
“어머, 아직도 몰랐어요? 저 집 노인네 자식이 셋이나 있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요. 그런데 다들 어디로……?”
“어디긴 어디예요, 하늘나라지. 집안 자식들끼리 모여서 해외여행이니 뭐시기를 갔다가 오는 길에 글쎄, 비행기가 추락했다지 뭐예요?”
“어머머, 세상에. 그럼 그 때부터 홀로 사셨던 거예요?”
“그럼요, 벌써 5년도 더 되었는걸요? 사고가 났던 때가 여름휴가 기간이었으니까, 딱 이맘때쯤이겠네요.”
“5년씩이나요? 에그, 쯧쯧. 진작부터 이리 가시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쉿! 상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아, 요 놈의 주둥이가 주책이지.”
형형색색의 우산이 여편네들의 속닥임과 함께 흔들렸다. 하늘은 아직도 굵은 빗방울을 간간히 떨어뜨리고 있었다. 파란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진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는 옆으로 누운 채인 수레만이 쓸쓸히 남은 가운데 커다란 물웅덩이가 흐릿한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노인의 라이터를 삼킨 흙탕물은 커다란 웅덩이가 되어, 어느새 수레의 바퀴 끝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주제 : 장르소설의 특성을 뺀, 최대한 순문학다운 소설/폐지를 줍는 독거노인과 5살 손자가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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