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7 07:02

산골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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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 이어진 산자락의 오솔길은 이리 휘고 저리 돌며,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단아한 풀꽃이며 곱게 빛나는 반딧불은 여럿 스쳐만 보내고, 두 걸인은 속히 내빼는 데만도 여념이 없었다. 이만 왔으면 누군가 더 쫓지는 아니할 만도 하였으나 그리 생각해 본들 혹시 모를 일이어서, 십 리를 넘어 오도록 숨 돌릴 틈조차 없이 잰걸음을 하였다. 나그네는 여인의 몸으로 이럭저럭 견디며 왔으나 반 시진 전만 하더라도 쥐 죽은 듯이 몸져누워, 물이나 겨우 들이키던 남편은 궁하고 옹색한 꼴로 고통에 찬 숨만 연신 허억, 허억 하고 들이마시고는 이리저리 이끌리며 힘겹게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며 내딛던 발걸음을 결국에야 멈추어 버렸다. 그러니 나그네도 더는 재촉하지 못하고 근방에 놓인 넙데데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남편을 살피는 한편 무심코 저 위를 올려다보노라니까, 달은 더없이 밝게 빛났다. 허나 그나마도 급하고 불안한 심정 탓에 편히 있지를 못하여 튀어나가듯, 힘없이 널브러진 남편의, 배를 곯아 앙상하고 깡마른 손모가지를 낚아채 일으켜 세우고는 다시금 잡아끌었다. 한편에는 훔친 것이나마 옷이 날개라고, 남편의 시커멓고 수척하기 짝이 없는 면상과 째진 눈, 내려앉은 코와 부러지고 썩은 이빨마저 퍽 곱상해 뵈어 기분이야 썩 좋았다만, 그런데도 늘 그렇듯, 그전 동리의 술집 주인에겐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덕돌이라 했던가, 뭣하면 비녀마저 챙겨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 하면 남편도 꽤 흡족해하였을 테지만, 막상 거짓 혼례를 치른다며 전 재산을 털어 쓰고 거나하게 취해 곯아떨어진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차마 거기에까지 손을 댈 요량은 없었다. 미련하고 우둔하기 짝이 없는 그 치는 정말로 이 나를 연모했던 것일까, 나그네는 개천을 건너면서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했다. 기껏해야 발목 즈음에서 그쳤으나 오밤중의 산바람은 차고 거센 탓에, 물은 뼈를 찌르는 듯했다. 술집 아랫목의 온기가 그리워 공연히 심정은 구슬퍼져서, 가슴팍 한구석이 아렸다. 지난 수년을 이리 살았거늘 이제 와서 무슨 방정일까, 하여 헛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 저 남자 마다치 않고 무릎께에 올라앉아 긴 긴 밤을 지새우는 것도 예삿일이건만, 남의 재물 훔쳐다가 연명하는 마당에 그까짓 은비녀 하나가 어찌 그리도 죄스러운 것이던가.

소작농의 사생아로 태어나 비렁뱅이의 아내가 된 지도 어언 오 년. 도적이며 춘부로 살아온 이 내 삶이란 고되고 애달픈 거짓과 술수로 얼룩졌으니, 흘러가는 물살은 차디찼고 - 저 창공의 명월은 그 몸뚱이를 꿰뚫는 듯하였다.

남편은 한 발 먼저 뭍에 올랐으나 나그네의 무거운 발길은 그 자리에 굳은 듯이 멈추어 야밤의 산자락에서, 구슬픈 풀벌레와 새의 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이대로 여기 누워 한 밤이건, 한 달이건 잠들고만 싶었다.

 

 길바닥서 태어나 버려졌으매 그 삶이 기구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으며 나그네는 그조차도 족히 여겼으나, 열네 살, 막 소녀티를 벗어 낼 무렵, 초시 댁 도령의 눈에 들어 동전 몇 닢으로 그리 갈 즈음만 하더라도, 비록 부인 아닌 첩이나마 양반가에 들었으니 초라하고 척박하기 짝이 없는 이 내 살아감에 비로소 꽃이 피었느냐, 하고 기뻐하였다. 허나 그 도령이란 지내보니 천하의 망나니며 난봉꾼이라, 몇 없는 재물을 팔아다가 갈보를 사고 술이나 진탕 들이키며 놀음판에 드나드는 것이, 성질마저 불같아 하루도 편히 보내는 일이 없어 모진 손찌검과 천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을 다짐하던 차에, 그 손을 잡아 끈 것이 바로 저 남편이었더랬다.

 

 그대로 이 고을, 저 고을로 다니며 배우고 는 것이란 아첨과 농, 기예, 술수, 화술에 구걸, 도적질이라, 얻어먹고, 훔쳐 먹고, 기회가 닿는 족족, 되는 대로 몸을 팔아 한 끼 때울 금전이나 구하며, 배를 곯는 것은 그 이상 어찌 할 방도가 없거니와 다치고 병들면 죽지 않기만을 비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발을 헛디뎌 크게 다친 이후 절름발이가 된 데다 근래에는 골병마저 든 남편을 외딴 오막살이에 숨겨 두고 닷새 밤낮을 드나들며 좁쌀이나마 몇 줌씩 훔쳐다 줄 수 있단 것만 하더라도 그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던가.

 

 허나 한참을 그리 있노라니, 이 앞에 펼쳐진 굽이치는 산자락도, 어디 있을지 모를 범 따위 산짐승도, 베개 밑에 그대로 남겨 둔 은비녀도 이내 허상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스스로를 향한 분노와 후회와 질책과 연민만이 오롯이 남아, 서슬 퍼런 비수가 되어 너절하게 썩어 문드러진 심정을 다시금 모질게 찔러 댔다.

 

 “도적년, 거기 있고나!” 벽락 같은 노성에 크게 놀라 뒤를 돌아보노라니 언덕배기 위에 올라 선 것은 다름 아닌 덕돌이요, 아연실색하여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개천 위에 철퍼덕, 하고 주저앉으려니까, 뭍의 남편은 희미한 신음을 연신 토하면서도, 어서 이리 오질 않고 무얼 하느냐며 성화였다. 허나 몸도 성치 못한 이를 홀몸으로 이끌고 장성한 사내를 따돌리기란 어찌 궁리해 보아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일순 머릿속이 백짓장이 된 탓에, 나그네는 그 자리서 빌빌대며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리고, 찢어지는 소리를 하며 빌고 또 비는데, 술집 외아들은 걸음을 내닫아 개천의 맞은편 기슭에 당도하고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앙다문 입을 하고는 나그네와, 남편의 다치고 상한 몸뚱이를 차례로 노려볼 뿐, 물을 건너올 기미는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한 식경이 다 되도록 그 자리에 버티어 있으려니까, 남편은 연신 무어라 소리쳤으나 기운이 미약한 탓에 나그네에게조차 닿지 못하였고, 이내 덕돌이는 품속에서 뭔가를 끄집어 내 그 자리에 조심스레 내리고는 곧장 뒤돌아 떠나 버리니, 한껏 옹송그린 채 꼼짝 않던 몸뚱이는 저릿하여, 제 심정대로 움직여 주지를 아니했다.

사내의 그림자마저 묻혀 갈 즈음에야 나그네는 반대편 기슭으로 나아가, 월광에 번득이는 그 물건이란 무엇일고, 하는데, 제 눈으로 비추어 보노라니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 할 겨를도 없이 비녀만은 소중히 품은 채 만월 아래 꿇어 앉아, 그저 흐느끼기만 하였다.


 * * *


 2015년 김유정 청소년 문학제 - 김유정 소설 속편쓰기 -  에서 은상을 수상했습니다. 낮은 등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쩐지 아쉽네요.

 김유정 단편집의 '산골 나그네'를 이어서 써 봤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결혼 사기를 주제로 한 작품이죠.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사실입니다. 


 우선 열 아홉 살 먹은 여인이 산골 동리의 술집에 찾아옵니다. 미망인이 되어 갈 곳이 없다며 도움을 청하죠. 술집 주인 모자는 나그네에게 방을 내 주고, 닷새 뒤에는 며느리가,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나그네는 그를 받아들이고 술집 외아들 덕돌이와 혼인하죠. 그리고 첫날 밤, 덕돌이의 새 옷을 훔쳐 가지고 야반도주를 감행합니다. ...????  뭔가 이상하다 싶죠. 놀랍게도! 외딴 오막살이에, 골병 든 비렁뱅이 남편이 숨어 있었던 겁니다. 나그네는 남편에게 훔친 옷을 입히고, 그대로 산길을 따라 달아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끊겨 버립니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죠. 어느 아침 드라마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베개 밑에 있던 은비녀는 그대로 놓고 가는데, 논평에서는 이를 두고 도덕성과 순박함의 상징이다, 라고 합니다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글을 대개 아무 생각 없이 쓰기 때문에.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이겁니다. 정작 쓸 때는 못 느꼈지만 다시 보려니까 나그네를 꽃뱀으로 만들어 버렸더군요. 뭐,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아, 이게 패인인가.


 네, 뭐, 그렇습니다.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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