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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정말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가면서 처음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그, 그러니까── 그 이한율 말하는 거 맞지? 저기, 1학년 때 자살했던."

"…맞아."

철우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이런 표정을 하는 철우는 나 역시도 처음 봤기에, 뭔가 더 이상 얘길 꺼내기가 꺼려진다.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할래?"

하지만 이왕 얘기를 시작한 것이라면 끝을 봐야 한다. 철우를 위해서도 그게 옳은 일이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둔다면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아, 응……. 그래."

다행히도 철우는 침착하게 대처해주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두 개의 커피잔에 커피를 한 스푼씩 넣는 사이 내 머리는 멋대로 입학식 때의 광경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버스 타고 학교 다녀야 돼. 학원도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 옮겨놨으니까 그렇게 알아.]

신학기 아침, 새로운 교복을 입으면서 엄마한테 질리도록 들은 말이었다.
학교, 학원. 엄마로서는 내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환경에 혼자만의 힘으로 적응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처음으로 발을 올렸던 순간까지, 엄마는 내 '성적'에 대한 이야기만을 늘어놓았으니까.

[알았어? 가서 쓸데없는 사고 칠 생각하지 말고, 중학교 때랑은 차원이 다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차피 너 아는 친구들도 없을 테니까, 그냥 맘 접고 공부나 해. 처음 모의고사 점수, 제대로 확인할 거야.]

[아, 알았어. 알았다고…….]

엄마의 말을 들으며 새삼 '고등학생은 역시 받는 대접부터가 다르구나' 하고 느꼈지만, 정작 입학식이 되자 고등학생은 뭔가 다를 거라는 내 기대는 금세 무너져내렸다.
초등학생 시절, 중학생 시절을 지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고등학생 시절을 향해 한 발짝 걸음을 옮겼음에도 교장이 연설하고 우리는 경청하는 방식의 입학식은 지루할 정도로 평범했고, 그런 입학식이 진행되면서 비쳐지는 우리의 모습 역시 중학생 때와 별반 다른 것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다를 것이 있었다면, 세상이 내가 익숙해했던 모든 것들과 나 사이를 떼어놓으려 작정한 듯 보였다는 것.
내가 다닐 학교는 우리 동네와 지역 단위로 떨어진 아주 멀디먼 학교였고, 덕에 난 15분만 걸으면 갈 수 있는 인근 고교를 두고 굳이 돈을 더 써가며 버스로 통학하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했다.
잡담을 나눌 친구도 없이 한 시간 동안 버스에 앉아 내릴 정거장을 기다린다는 일은 꽤나 지루한 일이었기에 졸다가 내릴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거지', 라는 불만으로 가득 찼다.

강제배정으로 들어오게 된 학교에서도 날 알아주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남녀합반이라는 불편한 제도 때문에 반에서 쉽게 '나'라는 존재를 어필하는 데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그 덕에 다른 반은커녕 우리 반에서도 제대로 친구를 만든다는 일이 불가능처럼 여겨졌다.
중학생 시절까지는 노력하지 않아도 옛날에 사귄 친구들과 섞여 즐겁게 지낼 수 있었건만, 고교생이 되자마자 난 교우관계를 새롭게 다진다는, 평범하게 진학한 다른 친구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만 했다.



"여기. 설탕 두 스푼 넣었어."

"오, 땡큐."

철우가 커피잔을 받아들자마자 입으로 가져가며 말한다. 후루룩, 약간 과할 정도로 액체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온다.

"음? 예상외로 안 뜨거운데?"

"너 그렇게 마실 줄 알고 일부러 약간 식혀놨다."

그렇게 말하며 다시 테이블에 마주앉은 우리는, 당분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들이킨다. '중요한 대화 이전엔 조용히 음료를 마신다'라는, 나와 철우, 단 둘만을 위한 암묵적인 규칙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장난처럼 생겨난 규칙이 아직도 유효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사소한 규칙까지도 잊지 않을 정도로 우린 '친하다'─── 는 걸까.

'…만약 한율이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친하게 지내고 있었을까.'

무심코 커피잔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는 내 모습에 쓴웃음을 짓는다. 이런, 인스턴트 커피를 가져다 향을 따지는 건 정말이지 바보같은 짓이잖아. 한율이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아, 잘 마셨다."

철우가 커피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말한다. 언제 다 마신 건지, 내 손에 들린 커피잔도 바닥이 드러나 있다.

"…그래."

그럼, 이렇게 계속 피하고 있을 순 없겠지. 숨을 고르고, 대화를 시작한다.



"기억나? 그 때의 나."

"음, 사실 별로. 입학식 이후로 한 달 정도는 '이런 애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존재감 없었어, 너."

"…그래?"

쓴웃음이 배어나온다. 하긴 그렇겠지. 처음 며칠 동안은 그야말로 시체처럼 잠만 잤으니까.

그 때의 내게 친구를 사귄다, 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학교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나 별 차이도 없다고 생각하고 긴장 놓고 있었던 내게 수업 시간의 '진지함'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숨막히게 느껴졌다.
선생은 잡담 없이 진도를 나갔고, 학생들은 정신없이 필기구를 놀렸다.
이따금씩 칠판에 큼직하게 적히는 것이 있으면, 몇몇 녀석들의 필기구 바꾸는 소리가 달그락거리기도 했다.
선생의 삭막한 말소리와 기계적인 필기음, 50분 동안이나 들려오는 그 지옥의 하모니는 지금에 와서도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그런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숨막히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잠을 자는 것.
다행히도 선생들의 목소리는 졸릴 때 자장가로 써먹기 편할 정도로 작았기 때문에, '자고 싶다'라는 의지만 있었다면 언제든지 얼굴을 두 팔에 묻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때는 잠만 잤었지. 점심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마냥 잠만 잤던 때도 있었어. 나, 참. 그 때는 왜 그랬던 건지."

"아, 그러고보니 너 애들한테 안 좋은 말 많이 들었어. '맨날 잠만 자고, 학교 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나라도 그랬겠다. 당연하겠지."

잠시 말을 멈추고, 그 때의 나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력하게,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시절. 

"아, 그래도 너 성적은 괜찮았잖아? 언제나."

"…학원 다녔었잖아. 학교에 익숙해지기가 힘들었으니까, 학교 공부도 학원에서 때우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성적은 유지했지."

"아……."

철우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겪었을 고생을 생각해서 배려해주는 거겠지. 나 참, 쓸데없이 착하다니까.

"그래, 여튼 그 때의 난 고교생이 된 걸 후회하고 있었어. 자퇴해버릴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그래도 너, 한 달 만에 친구 많이 만들었잖아? 너 좋아했던 여자애들, 꽤 많았는데?"

"우왓, 진짜?"

그건 정말 몰랐는데?!

"네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다니니까, 네 자신이 인기가 많았는지도 모르지. 나영이도 너 은근 신경쓰던데……."

"뭐? 유나영? 그 나영이?"

두 번째 충격. 유나영이라면, 같은 학년뿐 아니라 2, 3학년 선배들마저도 '여신'이라며 떠받들던 그 엄청난 미모의 부잣집 딸내미 말하는 거잖아?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 했지만 뭔가 말 걸기도 어색하고, 날 피하는 거 같아서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는데.

"그래, 그 나영이. 아, 그것보다 네 얘기가 먼저잖아."

"응? 아, 아……."

철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지금은 '그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한 달간의 치밀한 자기관리와 수많은 노력 끝에 난 그 끔찍했던 나날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늘에 매일 올린 기도가 빛을 발했던 건지, 학원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학교 생활도 함께 익숙해져버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차츰 잠을 청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대신 다른 친구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났다.
특별한 이벤트 하나 없던 4월이 지나고 온갖 꽃들과 중간고사 이야기가 만발하는 5월이 가까워졌을 즈음엔, 이미 예전의 내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과 섞여 있어도 어색한 느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 완벽하게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중학생 시절까지 또래 여자들과는 얼굴도 마주친 적 없었던 나였지만, 정신없던 적응기가 지나가고 나니 같은 반 여학생들에게 말을 거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그 소녀── 아니,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고, 또 얌전했다.
누구에게도 말을 걸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 특유의 말 걸기 힘든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다른 친구들도 그녀와는 실수로라도 절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뭐, 어쩌면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그래서 그 애 이름이────"

"응. 이한율."

"왕따였지, 걔."

"아마도."

잠시간의 적막. 찹쌀떡을 파는 아저씨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자전거 벨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첫 인상은 어땠어?"

"음……. 글쎄, 가난하다는 건 알 수 있겠더라고."

이, 한, 율. 주인의 이름이 커다랗게 적혀 있던,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구겨져 있던 낡은 실내화.
그래, 오히려 그게 다른 친구들이 그녀를 멀리했던 더 근본적인 이유에 가까울 테지.
원래는 흰색이었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신고 다녀 묵은때가 여기저기 들러붙어 회색빛이 감돌던 그 실내화는 집에 갈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그녀의 발에 신겨져 있었다.
신발도 그다지 깨끗해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 실내화랑 신발, 단벌인 것 같았지?"

"그랬겠지. 집이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신발 살 돈이 어디 있었으려고."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철우가 예상 외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어라,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꽤 잘 아네?"

"응, 걔네 집도 꽤 많이 들렀으니까. 아직도 위치는 기억나."

"우왓, 진짜?"

"…그거, 아까 내가 한 말 아니었나?"

그다지 이상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철우는 그 쪽 이야기가 더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어떻게 갔어? 아니, 언제 갔어? 아니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어?"

"…적어도 질문은 하나씩만 해라."

철우가 예상외로 눈을 빛내며 들이대는 바람에,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말도 못 할 것 같다.



'…그래도, 제대로 말은 해야겠지.'

그래, 혼자 마음앓이하는 건 질렸다.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손을 뻗고 싶었기에, 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part 1, end. see you next story-


※작가의 말.

수능이 끝나기 전까지, 당분간은 글 올라오는 일 없도록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써뒀던 분량까지는 여기에 올릴 생각이지만, 그것도 다음 편이면 끝이네요 ㅠ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