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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눈 온다."

철우가 말한 그대로, 하늘은 희뿌연 구름 사이로 자그마한 눈들을 잔뜩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그렇게도 언급하던 첫눈. 겨울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모두가 바라던 첫눈이 이제야 내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게, 눈 오네."

아무 표정 없이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연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따스한 말을 나누며, 아이들은 주먹만한 얼굴을 하늘로 향해 막 내려오는 눈송이들과 무언의 인사를 나눈다. 평소에는 결코 보지 못할 최고의 그림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상가의 거리는 떠들썩해졌다.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비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점원들의 발걸음도, 온갖 궃은 일에 시달린 후 지친 몸을 이끌며 집으로 향하는 후줄근한 양복 차림의 중년 아저씨들의 발걸음도 가볍게 보였다. 첫눈은 세상을 마법처럼 바꿔준다고 했던가? 그 말을 사실이라고 믿어버릴 정도로, 아무도 웃음을 비치지 않던 회색빛 거리는 순식간에 생기 넘치는 사랑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온다 온다 하면서 안 오던 눈이 이렇게 한 번에 내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야."

웬만하면 낭만은 개나 주라며 길거리의 애꿎은 연인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을 철우도 이번엔 첫눈을 내심 기대했던 것인지, 별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큼직큼직하게 내려오던 눈송이들은 어느새 바닥에 쌓여 흰 자욱을 여기저기에 남기고 있었다.

"…그러게."

하늘에서 뿌옇게 흩날리는 그 아름다운 첫눈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 소녀의 모습이 배경에 겹쳐진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망가져버려, 가장 아름다운 눈물 한 방울만을 남기고 꽃잎이 되어버린 소녀. 잘못된 선택으로, 완전히 잘못된 결말을 맺었던 불행한 소녀. 다른 아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했었고,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소녀.

그래, 내가 죽였던───── 그 소녀.



"야, 야! 정신 차려봐!"

아득하게나마 들려오는 철우의 목소리에 놀라 퍼뜩 잠에서 깨어보니, 익숙한 천장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검은 물체가 살짝 천장을 가린다.

"괜찮아? 열은 없고?"

철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마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필시 철우 녀석이 내 이마에 손을 얹은 거겠지. 이 자식, 열을 재는데 손이 차가우면 어떻게 재겠다는 거야. 뭐, 친구가 걱정된다는 마음은 이해한다만.

"뜨거운 것 같은데……. 열이 있는 건가?"

"…열 없어, 괜찮아."

하지만 이대로 철우의 걱정을 더 받아봤자 내겐 도움될 일이 없다. 오히려 온갖 일을 다 벌려놓고 뒷처리는 나한테 살짝 떠넘길 것이 뻔하지. 이럴 땐, 차라리 내가 멀쩡하다는 점을 어필하는 편이 이득이다.

"정말? 하, 괜히 걱정했네. 야, 임마. 왜 갑자기 멀쩡히 걷다가 기절하고 난리야? 여기, 너희 집까지 업어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거야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은 그 상가에서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주택지의 제일 끝자락에 위치한 원룸빌라니까. 보통 돈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간단하게 택시 하나 불러서 4천원만 소비하면 될 거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알바자리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한 철우의 경우에는 장장 20분을 걸어야 하는 아주 멀디먼 거리로 여겨졌을 것이었다. 게다가 나를 등에 업은 채 여기까지 왔어야 했으니, 철우의 과장 섞인 말투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마라톤 절반 거리쯤은 달린 것처럼' 힘들었을 테지.

"…미안하다."

"응, 그래."

철우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제 발이 저려 왜 내가 갑자기 기절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보아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투다.

"네 표정 보니까 어차피 제대로 알려줄 거 같지도 않구만. 안 그러냐?"

갑자기 정곡을 찔려 멍하니 철우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사나이들의 우정을 무시하지 말라고, 함께 웃어넘기는 철우를 보고 있자니 몇 년 전의 즐거웠던 고교생활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다. 물론, 좋은 기억은 좋지 않은 기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학교 선배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얻어맞은 일,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완전히 반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취급을 받았던 일, 그리고──────

6층 빌딩 옥상에서, 차디찬 바람에 나부끼는 흰 셔츠 한 장만을 몸에 걸친 채 날 향해 두 팔 벌리던, 한 소녀의 눈물 섞인 추락.

"…야, 비밀 얘기 하나 해도 되냐?"

"뭐? 너 아직까지도 나한테 뭐 숨기고 있었냐?"

장난스레 답하던 철우의 얼굴이, 내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금세 굳어진다.

"뭔데, 중요한 이야기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그래, 그냥 첫사랑 이야기."

정작 입에 그 소녀의 이름을 담으려 하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눈 내릴 때쯤이면 언제나 내 머릿속을 흔들어놓던 그 소녀, 내 첫사랑이었으며 동시에 나로 인해 죽은 불행한 소녀.

"뭐야, 첫사랑 이야기냐? 근데 뭐 이리 진지해?"

"……."

목이 타는 것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에겐 지금까지 숨겨왔던 내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를, 난 지금 내 절친한 친구에게 하려고 한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일단은 그녀의 이름부터.

"이, 한율."

"───────뭐?"

그녀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철우의 표정이 다시 굳어진다.

"걔가, 내─── 첫사랑이었어."



-Pro end. See you next story -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엄청 늦었습니다. 수능이 코앞이라, 이젠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도 부담되는 나날이네요 ㅠ

연재 방식은 '자유'입니다. 시간 두고 천천히 쓰려고요. 좀 더 나은 대학 들어가려면 그래야 해서리...
  • profile
    Octa 2014.03.22 20:31
    엄청 오랬동안 잠수이셨던 것 같은데, 이런 소설 보는것도 반갑네요 ㅋ
    규칙적이지 않아도 연재만 해주세요!
  • ?
    개소실 2014.03.23 04:32
    으허, 죄송합니다... 수능이 코앞이라...
  • profile
    리븐 2014.03.25 04:54
    생각해보니

    이 분이 초창기에 '판타지는 중2병을 모른다.'를 연재하시던 분이셨을줄은;;;

    역시 이 서버는... 대단해...
  • ?
    개소실 2014.04.02 06:48
    허허... 판중모, 아직 실력이 한참 부족해서 묻어놨던 소설입니다 ㅠ

    여튼 잘 부탁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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