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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령─── 씨?"
…난 분명 교실에 있었고, 종소리를 막 들었을 텐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째 다른 의미로 굉장한 금발 장신의 미남이 교탁 앞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학생을 부르는 데 '씨'라는 칭호는 보통 안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검은 머리를 정갈하게 뒤로 묶은 여학생이 손을 들고 일어나 조용히 말하고는 다시 앉았다.

"아, 네. 알겠습니다, 지온휘 양."
선생님, 이라고 불린 금발 장신에 엄청 비싸보이는 검은 턱시도를 입은 미남은 그 여학생에게 나긋하게 말하고는, 머리에 쓴 중절모를 벗어 가볍게 인사를 했다.
"…네."
내가 알고 있던 선생의 이미지와 명문 중의 명문고등학교의 선생의 이미지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는 충격에, 멍하게 손을 든 후 조용히 말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 이제야 모두의 이름을 알게 되었군요. 일단 제 소개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전 오늘부터 1년동안 여러분과 함께 할 크론드라엘 미르니엄입니다. 간단하게 크로라고 불러 주세요."
크로 선생님은 생김새나 말투나 이름이나 모두 상식에서 심각하게 벗어나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 선생님에 대해 궁금하신 것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주시겠어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크로 선생님은 잘 되었다는 듯 탁, 소리가 나게 흰 장갑을 낀 손을 마주쳤다.

"네, 더 이상 다른 질문이 없는 듯하므로 오늘의 HR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오리엔테이션으로 여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오늘은 선생님에게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요. 그럼, 실례."
크로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교탁 위에 얹어놓은 검은 서류가방을 번쩍 들어올리셨다. 희진의 몸은 괜찮을까, 생각하며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령 씨, 잠시."
크로 선생님이 살짝 손짓을 하며 날 부르셨다.
"아, 네."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문이 닫히기 전, 교실을 죽 둘러보았더니 잡담을 하는 학생, 공부를 하는 학생 사이 아까의 그 여학생이 날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학생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

교실 문을 닫자마자 크로 선생님이 날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에, 잠시 절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하령 씨."
"예……."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무심코 알겠다고 답해버렸다. 선생님은 싱긋 웃어주시더니 먼저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의 큰 보폭을 따라 엉거주춤 걷고 있자니,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하령 씨도 제가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예?"

선생님은 별 생각없이 가볍게 물어보신 것 같았지만, 솔직히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어색하단 뜻이지, 생각하려니 선생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아, 질문을 바꿔야겠군요. 하령 씨도 제가 이 곳에 여러모로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나요?"
"……."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까 그 질문이랑 어디가 어떻게 달라진 거죠? 라고 묻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침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설마 다른 나라에서 이 곳에 오니까 문화 면에서 여러모로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걸 다른 식으로 말씀하신 건가?
"…네, 솔직히요. 복장도 그렇고, 인사법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역시, 그런가요. 벼락치기로는 무리였네요."
선생님은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아, 괜찮아요. 천천히 알아가는 재미도 있잖아요, 문화라는 건."
그렇게 말하자, 선생님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시며 웃으셨다.

"아, 그리고."
"예, 말씀하세요."
"혹시, 마술 믿으십니까?"
"…네?"
선생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선생님은 딱히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글쎄요……. 싫어하지는 않지만, 믿는다라……."
지금까지 마술을 볼 땐 단순히 마술사의 손놀림과 실력에 감탄했지, 정작 마술 자체에 감탄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마술은 신비롭기보다는 트릭이 넘쳐나는, 마술사의 능력에 비례한 기술이라고만 생각해왔기에, 마술을 믿는다는 말은 조금도 내게 어울리지 않는 셈이었다.

"흠, 그런가요."
내 생각을 말하자, 선생님은 턱에 손을 짚고 무언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마치 무언가를 더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듯했지만, 그 이후로 선생님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셨다.

"…아, 도착했군요."
크로 선생님이 걸음을 멈춘 곳은 본교무실. 중앙 복도의 교직원 화장실 맞은 편에 위치한 곳이었다.
"말동무가 되어 주어서 고마워요, 하령 씨. 다음에는 조금 더 의젓한 모습으로 만나뵐게요."
"예…, 네?"
순간, 무언가 이상한 전개에 '어라?' 라는 식으로 말끝이 올라가 버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날 그대로 내버려둔 채, 본교무실로 들어가버리셨다.

"서, 선생님…?"
이용당해 버렸다는 걸 깨닫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 짧은 잡담 하나 하자고 날 부르신 건가……. 왜 이리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상한 거야, 젠장. 어째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돌아갈까."
더 이상 생각해봤자 시간 낭비다. 일단은 그냥 교실에서 예습이나 하자.



입학식은 아무리 명문 고등학교라 해도 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엄청난 크기의 강당에 전교생 착석 가능한 의자의 품질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형식적이고 어쩌면 너무 뻔한 입학식의 모습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런 와중에 우리 장학생들은 연단에 올라 장학금을 받았고, 덩달아 기숙사생들을 위한 ID카드를 발급받게 되었다.

"역시 명문고구나. 엘리트들 중에서도 장학생은 완전 양반 취급해주네……."
교장의 지루한 연설을 듣고 있자니, 희진이 바로 옆자리에서 내게 귓속말을 걸어왔다. 우연히 이 자리에 앉게 된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그래야 학생들의 경쟁 의식이 심화되고 학교 수준은 높아질 테니까."
조그맣게 말을 걸어왔으니 나 역시 조그맣게 대답해 주었다. 희진이 무언가 재미있는 말이 생각난 듯 킥킥대며 내 귀에 대고 말하려는 순간,

"으흠!"
하고, 흥(?)을 깨는 헛기침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까 전에 교실에서 눈이 마주쳤던 여학생이 팔짱을 끼며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여학생은 의도했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는, 이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여학생의 도발적인 태도가 마치 나를 괴롭히는 것만 같아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하루, 저 애 누구야?"
툭, 툭. 어깨를 두드리며 물어오는 희진.
"몰라……. 아까부터 저러네."
들으란 듯이 퉁명스럽게 내뱉고,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입학식이 끝날 때까지 뒤에서부터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고, 그 덕인지는 몰라도 입학식은 순조롭게 끝났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방송이 들려왔다.
[아, 아.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한 본교 일정 조정에 의해 금일의 수업은 없습니다. 본교 학생들은 속히 귀가하여 교실에 남는 학생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기숙사 배정이 확정된 학생들은 본교무실의 기숙사 담당교사를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오오."
갑자기 일정이 조정되었다고 한다. 역시 명문고,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구만. 교실 안의 학생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것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으음, 본교무실인가……."
희진 역시 기숙사 배정 확정이었다. 이왕 갈 거면 희진과 같이 가는 편이 낫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고 막 짐을 챙겨 교실을 나가려니,
"쯧."
갑자기 뒤에서 아까의 그 여학생이 혀를 차고는 나를 앞질러 교실을 나갔다. 시비를 걸어오는 듯한 여학생의 행동에 잠깐이나마 잊고 있었던 짜증이 다시 치미는 것이 느껴졌다.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야, 아까부터.

"…하아."
멀어져가는 검은머리에 대고 욕이라도 뱉어볼까, 하는 생각에 입을 열었지만 곧바로 관뒀다. 학기 초에 안 좋은 트러블을 일으키긴 싫고, 애초에 저 여학생이 조금 그랬다고 바로 예민하게 구는 건 말 그대로 치졸한 짓이니까. 안 그래도 일방적으로 미움사고 있는데, 이쪽에서 먼저 피하면 싸울 일은 없겠지. 약간 씁쓸하지만, 뭐 어때.
"이얍, 하루!"
"하, 루, 아, 니, 라, 고."
…일단은 사람 본명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 구제불능 중2병 중증환자와 본교무실로 가는 게 시급하니까, 검은머리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하령이네 반 담임, 어떤 사람이야?"
"응? 글쎄, 조금 이상하신 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착하신 거 같아. 애들과도 금방 친해지신 것 같고."
"흐음───. 이름이 뭔데?"
"에……. 크로, 라고 부르라고는 하셨는데……."
"우와, 외국인이야?"
희진과 나는 본교무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의 담임선생님에 대해 잡담을 나눴다.
"너희 담임은 어떤 분이신데?"
"응? 우리 선생님? 그냥 평범해!"
"그래? 성명이 어떻게 되시는데?"
"명회연 선생님! 수학 담당이라고 하셨어."
"으음, 알았어."
희진네 선생님은 아직 희진의 '증상'에 대해 잘 모른다. 내일 조금 시간을 내어 상담을 받아보는 편이 좋을테지.
'…이번엔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싱글대는 희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옛날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 한 쪽이 먹먹해졌다.

"…하아."
"응? 하루,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그래,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자. 일단 지금은 신학기 첫 날이니까.
"하루! 아까부터 왜 이리 멍하니 있어! 안 들어와?"
"하루 아니라니깐 그러네."
희진은 그런 내 맘은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어주었다. 희진의 지금 웃음은, 날 위해 웃어주는 웃음인가, 자신의 의지로 웃는 웃음인가. 속으로 물음을 던졌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복잡하게 얽혀버린 마음이, 귀를 막아놓은 것마냥 답답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아, 하령 씨… 군. 아까는 고마웠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크로 선생님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며 말씀하시고 계셨다.
"네…, 네? 아, 예, 예……."
그제서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낸 후, 입을 열었다.
"저, 기숙사 담당 교사란 분이────"
"네, 저랍니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겠군요."
 크로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 물어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까지 봐 온 표정 중 제일 밝은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우와, 저 천진난만한 어린이같은 표정. 벌써 주위의 모든 여자들의 표정이 달라졌────
"───에?"
"…흥."
어라, 이건 내가 잘못 본 건가?

"저, 선생님?"
"네! 왜 그러시나요?"
애써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하고,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은 후, 입을 열었다.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죠?"
내가 가리킨 손가락의 끝에는 마치 작가가 짠 시나리오처럼, 나를 노골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검은 색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 있었다.
"아, 모르셨나요? 지온휘 양은 이 훌륭한 학교에 전교 3위로 기숙사가 확정된 엘리트랍니다. 이상하네요, 분명 단상에 같이 올랐을 텐데요?"
아, 그래서 내가 상장을 수여받았을 때 옆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구나.

…잠깐. 그것보다, 이 녀석도 기숙사 확정이라고?
"선생님…? 아마, 제가 알기론 이 학교 기숙사는 남녀 공동이었던 걸로……."
이젠 이빨까지 드러날 정도로 환한 표정을 지으시며, 크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네,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친구가 되겠군요. 자, 모두들 1년 동안 잘 지내 봅시다!"
"…네?!"

 

※작가의 말.


핰. 늦어버렸다 ㅋ


추석 너무 거지같아요…….

 

※addition.

 

수정을 좀 가미하였습니다. 텍스트의 처음 부분이 저도 모르는 사이 삭제되어 있었기에, 이제서야 고치네요 ㅠ 계속되는 실수에 죄송하다는 마음뿐입니다.

  • profile
    코인천국 2013.09.23 05:36
    언제나 처럼 다음이 기대가 되네요.ㅋㅋ 어떤 내용들이 있으려나.ㅋㅋ
  • ?
    개소실 2013.09.24 02:19
    에고, 아직까지 봐 주셔서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 profile
    Just 2013.09.23 06:26
    잘 지내 봅시다.
  • ?
    개소실 2013.09.24 02:20
    잘 지낼 수 있어야지...

    그것보다 레벨이 상당히 높아져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 profile
    IODES 2013.09.24 00:20
    항상 꾸준하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
    개소실 2013.09.24 02:20
    아이고, 댓글 달아주셔서 영광입니다 :)
  • profile
    하얀나무 2013.09.25 05:27
    어째서 남여공동이죠!
  • ?
    개소실 2013.09.25 07:18
    먼저, 읽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

    제목을 주의 깊게 봐 주십시오. "판타지는 애초에 말이 되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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