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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부터 새로 기숙사에 살게 된 녀석들이다."
여러 의미로 돋보이는 짙은 눈썹, 무뚝뚝한 표정, 굵고 중압감 넘치는 목소리, 짧게 밀어버린 스포츠머리, 엄청난 키. 누가 어른이라고 하면 그대로 납득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숙사 대선배, 3학년 4반의 성조훈 선배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짧은 정적. 그리고,
"헤, 그렇구나."
"흥, 신입따위."
식탁에 앉아 잡지를 보시며 과자를 먹고 있던, 누가 봐도 염색이란 걸 알 수 있을법한 노란색 머리의 선배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무언가를 즐비하게 깔아놓은 날카로운 눈매의 선배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짧게 답했다.
"에, 잘 부탁드립니다……."
희진과 검은 머리(이름을 까먹어 버렸다)가 내게 눈짓으로 '빨리 뭐라고 말 좀 해 봐' 라며 무언의 압력을 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신입생 대표로 인사를 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선배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조훈 선배는 다른 용무가 있는 듯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뭐야, 아직 안 갔어? 아, 귀찮아 죽겠는데. 야, 운혜. 네가 안내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노란 머리 선배가 잡지를 덮다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대놓고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른 선배의 머리를 두드렸다.
"이거 치워. 내가 왜 그런 하찮은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게다가, 지금 내가 꺼내놓은 물건들이 안 보이는 건가?"
운혜, 라고 불린 날카로운 눈매의 선배가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을 더 가늘게 치뜨며 노란 머리 선배의 손을 쳐냈다.
"하, 참. 그딴 괴상망측한 물건들따위, 내가 알 게 뭐람? 내가 싸잡아 버릴 것도 아니니까, 신입생 처리 좀 하라고."
"뭐? '그딴 물건들'이라고? 지금 싸움거는 건가?"
"그럼. '그딴 물건들'이지,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건데? 이 오타쿠년아."
"지금 나의 취미마저 비웃으려는 건가? 쓸데없이 노란 털로 순진한 남자들을 현혹시켜 놀아나는 것밖에 할 줄도 모르는 파렴치한 인간 주제에."
"무, 지금 그 말은 내가 창녀라는 거야?!"
선배들의 말싸움에 점점 노기가 실리기 시작할 무렵, 바닥의 잡동사니들을 여기저기 뜯어보던 희진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와아! 선배, 이 많은 한정판들을 어디서 구하셨어요?"
"야, 지금 말을 걸면……."
눈치없이 끼어들려는 희진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곧 선배들의 공격 대상이 희진으로 바뀌겠지, 하는 생각에 대신 사과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네가, 이것들의 가치를 알지?"
다행히도 운혜 선배가 갑자기 희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노란 머리 선배는 아직 성이 차지 않는 건지 흥, 하고 짧게 신경질적인 코웃음을 치고는 우리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 버렸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희진은 놀이공원에 놀러온 꼬마애처럼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맞죠? 맞죠? 이건 '어느 나라의 마술목록' 한정 판매 블루레이 CD고, 저건 '지구인들이 달에서 처들어온다는데요?' 한정 엑스트라 피규어!"
희진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영문 모를 전문용어(?)를 뱉어내자, 운혜 선배의 표정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 외에도 여러가지 있네요! 'N큐브' 도구 디자인 기획 페이퍼라던가, '알바뛰는 천신님' 초레어 사운드CD라던가!"
희진이 물건을 계속 손가락질해가며 소란스럽게 떠들어댔지만, 나와 검은 머리는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멍하게 물건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오오,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후배가 이 기숙사에 들어왔다니! 정말 기쁘구나!"
운혜 선배와 희진이 동지애를 뽐내듯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옆에서 조용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해 보여?"
검은 머리에게 슬쩍 말을 걸어 보았다. 딴에는 이왕 같은 기숙사생이니 적어도 말은 놓고 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시도한 대화였지만,
"말 걸지 마. 그리고 잘 모르면서 대충 넘겨짚지도 마. 기분 나쁘니까."
검은 머리는 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고는 빠르게 기숙사를 나가버렸다. 딸랑딸랑─ 문에 걸려 있던 종이 크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대체……."
검은 머리의 무례한 언행에 어이가 없어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하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날 싫어하는 녀석인데, 평범한 대화가 가능할 리가 없으려나.
"저렇게 까칠한 녀석을 매일, 하루의 절반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악몽이다.

"좋아, 신입! 날 따라와라. 여기의 룰을 대충 가르쳐주마."
멍하니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깊은 고찰을 행하고 있자니, 운혜 선배가 어느새 바닥에 늘어놓았던 소장품(?)들을 챙겨들고는 내 품에 얹어놓고 있었다.
"엇, 갑자기 왜────"
"첫째, 선배의 말은 하늘과 같다. 알아서 떠받들어라, 이 말이다."
선배는 내 반론은 1g도 들을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확실히 하고 싶은 듯, 빠르게 말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루! 그거 엄─청 귀중한 것들이니까, 하나라도 떨어뜨리면 안 돼! 알지?"
희진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린 후 선배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야, 조심……."
덜렁대다 다칠까 한 마디 해주려 했지만, 희진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대신 위에서 희진의 활기찬 말소리가 아랫층까지 들려왔다.
"…으앗."
아래도 보지 않고 계단을 오르려다 발을 헛디뎌 손에 든 물건들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거, 사돈 남 말할 때가 아니군. 다시금 물건들을 고쳐잡고 빨리 오라며 닦달하는 선배의 뒤를 따라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운혜 선배의 방에 물건들을 가져다놓은 후에야(선배의 방은 엄청 너저분했다. 정작 본인은 신경쓰지 않는 듯하지만) 배정받은 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1학년들은 3층, 운혜 선배와 아까의 그 바가지머리 선배 등 2학년들은 2층, 성조훈 선배와 얼굴 보이는 일이 매우 희귀하다는 기휘율 선배 등 3학년들은 1층에 방이 있다고 운혜 선배가 알려주었기에, 지금 우리는 자연스럽게 3층에 있다.
"내 방은 복도 맨 끝자리네. 너는?"
"하루 바로 옆방! 만세!"
희진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했다. 가볍게 희진이 내밀은 손바닥에 하이파이브를 해준 후,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혼자 사는 방치고는 상당히 넓은 데다가, 채광도 좋고 깔끔했다. 역시, 명문은 남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건 그렇고 몸이 근질근질하네. 지금 시간이, 어디…….2시 13분인가. 아직 점심도 못 먹었으니, 샤워 먼저 하고 난 후 나가서 아무거나 사먹는 편이 좋겠다.
"그럼 나 이제 슬슬 씻을 테니까, 그 누구였더라……. 하여튼 돌아오면 잘 안내해줘."
"응! 지온휘 말하는 거지?"
"…걔 이름, 지온휘였구나."

여전히 새로운 생활에 들뜬 건지 싱글벙글인 희진을 두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보았다. 쏴아아아─── 손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 뿜어져 나왔다.
"음, 수도 상태 이상 무."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세면도구들은커녕 비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명문학교의 기숙사라고 해도 역시 웬만한 생활도구들은 직접 챙겨와야 하는 듯했다.
'집에 있는 것들을 가져오는 건 역시 조금 그러려나.'
비누나 샴푸, 바디워시 같은 건 어머니가 명절마다 택배로 보내주시는 선물세트들 덕에 넘쳐나니 집에서 가져오면 될 것 같고. 칫솔이나 치약 같은, 챙기기 수월한 물건들만 따로 사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 외에 사야 할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생각하며 복도로 나와 보니, 한 번도 본 적 없던 남자가 수상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성조훈 선배보다는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큰 키, 검은색 가죽재킷에 왼쪽 팔뚝에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 십자가 모양의 문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연녹색 삐죽머리. 폭주족의 와일드함이 연상되는, 그런 남자였다.
'대체 여기엔 정상적인 사람은 없는 거냐고…….'
일단 말이라도 걸어보자, 하는 생각에 입을 열었으나,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황급히 몸을 돌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
기숙사에 들어온 지 30분째. 점점, 이 기숙사에 사는 멤버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 profile
    Just 2013.09.28 10:47
    남녀 옆방배정이라니 사스가 명문고
  • ?
    개소실 2013.09.29 09:05
    사스가... 명문이란 곳은...!
  • profile
    코인천국 2013.09.28 22:27
    계속 잘 보고 있습니다!~ㅋ
  • ?
    개소실 2013.09.29 09:05
    에구, 비루한 글을 잘 봐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앞으로 더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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