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둠은, 언제나 소리 없이 우리의 주변에 머무른다. 빛과 서로 등지고 있는 그 특성 때문에, 우리는 그 어둠들을 빛만큼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림자'라고 불리는 그것들은 특정한 형체도 기척도 없이 그저 그렇게, 우리들의 곁을 떠돌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유 없이 빛 뒤에, 당신들의 뒤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밤이 되고 자신들의 무대가 비로소 갖춰졌을 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위한 가장 만만한 그릇인 당신들을 노리는 것이]
"나원 참, 이런 게 뭐가 재미있다고."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삑! TV의 화면이 꺼지고, 넣어 두었던 DVD가 튀어나왔다. 라벨에 매직으로 'D-3'이라고 휘갈겨진 검은색 DVD가. 내용물은 희진의 자칭 '최신 보물'이자, 쓸데없는 헛소리가 가득한 CG투성이의 조잡한 영상. 이 DVD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희진이 내게 '하루가 꼭 봤음 좋겠어!' 라며 건네준(건네주었다기보단 강제로 손에 얹어놓고 튀었지), 지난 주 금요일 오후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SBC에서 방영된 '동양이 선정한 10대 판타지 소재' 녹화본이다.
"흐아아아암…….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방송을 방송사에선 어떤 생각으로 내놓은 거야."
자동으로 하품이 나왔다. 애초에 잠은 제때 꼬박꼬박 챙겨 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도 이런 거나 녹화해놓다니. 희진이 녀석, 내일 밥 먹으러 오면 꼭 야단쳐야겠다. 아니, 오늘인가?

"아으으으으으."
팔을 위로 올려 기지개를 펴니, 등에서 두두둑 하고 굉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예습은 끝났는데, 잠은 안 오니 희진이 준 DVD나 봐 볼까'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틀어놓은 DVD가 진짜 날 소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잠들게 만들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몸이 굳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하여간 다른 의미로 굉장한 방송이었다. 그래, 밤중에 방영된 것이 왜였는지 대충 알 것도 같다.

"…잠이 안 와."
하늘은 끝자락서부터 어슴푸레 비쳐오는 태양빛에 아름다운 검푸른 색을 띠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밖은 어두웠고, 거실 역시 불을 켜놓지 않은 상태로 DVD만 켜놓았던지라 꽤 깜깜한 상태였다. 옆에 놓아두었던 폰을 집어 대기화면을 띄워보았다. 04:14. 기상시간보다 한 시간 15분 정도 일찍 일어나 버렸다. 하지만 소파에 앉은 자세로 너무 깊게 자버린 건지, 다시 잠을 자기엔 정신이 말짱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할 만한 짓은────

"…바람이나 잠깐 쐴까."
그래, 바람이나 쐬자.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추위를 느끼지 않고 겨울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새벽 네 시……. 가벼운 옷차림으로 조깅을 해도 정말 아무런 느낌도 없을 것 같다. 신월 공원까지만 돌고 오면 기상 시간과 대충 맞을 것 같으니, 간만에 좀 달려 볼까.



"으우, 추워."
트레이닝복 위에 가벼운 후드티, 달리기 편한 신발, 스포츠 타월과 따뜻하게 데워놓은 물이 들어있는 물통! 이것들만 있으면 당신도 조깅 패셔니스타…는 개뿔, 얼어 죽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복 안에 내복을 한겹 더 껴입는 건데. 곧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라고는 하나,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의 찬 바람은 가벼운 운동복으로 버티기엔 너무나도 시렸다.

"준비운동, 준비운동."
조깅을 하기 전에 다리 관절을 풀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준비 운동이 끝났으면, 시간을 확인. 04:20, 좋아. 목적지는 옆 동네의 신월 공원, 예상 시간은 약 한 시간─왕복 30분 정도.
"흐읍, 하아, 흐읍, 하아……."
책에서 배웠던 대로 호흡법을 연습하고, 신발끈을 확실히 매고───

"시, 작!"
달리기를 시작한다. 시선은 정면, 어깨의 힘을 빼고 주먹을 가볍게. 약 5도 정도 기울인 자세가 적절하다고 했지. 발은 발뒷꿈치서부터 발가락 순서대로 땅을 내딛으라고 했고. 원래는 아스팔트 길에서 조깅을 하는 건 다리 관절에 무리가 올 수 있다고 했지만, 내게는 적정 코스를 찾을 시간이 없었으니 패스. 찬 바람에 손이 얼고, 얼굴이 얼얼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기분만은 상쾌하다. 그래, 이게 운동의 묘미라는 거지. 이대로, 계속 달리자.



내 이름은 하령이다. 생각해보니 자기소개를 상당히 늦게 시작한 기분이 드는데, 그건 착각일 것이다. 뭐,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여튼 내 이름은 하령. 앞으로 약 1주 후면 고교생이 되는 평범한 남학생이다. 취미는 독서, 특기는 공부, 좋아하는 건 낮잠. 그리고, 싫어하는 건 [판타지]. 허용 범위는 공포 영화(좀비물 제외), 과학 공상(SF)까지. 다른 건 다 봐줄 수 있지만, 판타지에 관련된 것들은 뭔가 싫다. 초능력, 마법, 이세계 같은 요소들은 정말이지 꼴보기도 싫고, 게임, 책, 만화, 영화 등등 모두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것들은 접하기가 꺼려진다. 공포증이나 기피증 같은 건 아니지만, 뭔가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면 불쾌한 어떤 것이 가슴 속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알 수 없단 말이지.'

몇 번이나 무엇 때문인지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 그도 그럴 게, 트라우마라 할 만한 기억이 하나도 없으니까. 일단은 기억에 없는 안 좋은 추억이 트라우마로 작용되어 그런 것이다, 라는 식으로 대충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흐읍, 하아, 흐읍, 하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앞에 '신월 공원'이라고 새겨져 있는 기둥이 보였다. 벌써 신월 공원에 도착한 건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4시 43분, 예상 시간보다 7분 일찍 도착했다.
"하아……. 조금 쉬었다 가도 되겠다."
안 그래도 조금 휴식이 필요했던 차였다. 잠깐 벤치에 앉아서 쉬고 가는 편이 낫겠지. 5분만 좀 쉬었다가, 천천히 돌아가자────

"…어라?"
그렇게 생각하며 입구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 무언가 찌릿, 하는 느낌이 발끝부터 올라와 심장을 따끔하게 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생각하며 한 발을 더 내딛자 아까보다 더 강하게, 심장에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간만에 운동을 해서인가…….'
당연하겠지. 방학 내내 집에서 놀다가 한 달만에 나와서 몸을 혹사시켰으니. 심장이 조금 아파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었다. 안되겠다. 그냥 빨리 돌아가서 샤워나 하자.

"───거기, 누구?"
돌아가려고 발을 떼자, 작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칫하면 바람 소리로 착각할 뻔할 수 있을법한 아주 작은 목소리. 이 밤중에, 공원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아니지, 아닐 거다. 그래, 바람 소리 맞겠지.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음, 그렇고 말고. 자, 뒤돌아보자. 분명 아무도 없을 것이다────

"…보여져버렸네."
처음엔 기척조차 없었던 공원에, 언제 나타난 건지 괴상망측할 정도로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검은 옷을 입은, 흰 머리칼의 꼬마가 있었다. 꼬마의 주변은 황금빛으로 가득했고, 꼬마의 눈 역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황금빛은 꼬마의 바닥에 그려진 그림에서부터 튀어나오고 있었는데, 그 그림은, 그래, 마치 판타지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괴이한 그림이었다.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이, 1g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자연 현상 중에서는 '그림에서 빛이 뿜어져나온다' 같은 원인도, 원리도 알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은 없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아니, 방금 뭐라고 말한 거 아니었나? 어떻게 하지? 답 모를 자문만이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뒤죽박죽 섞였다.
"하필이면 이 때라니, 곤란하네."
아, 그래! 도망치는 거다! 자, 도망쳐 버리자!

"아, 잠깐……."
"죄, 죄송합니다! 부디 좋은 하루 되시길!"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 척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뒤를 돌아보니 공원은 실루엣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건지 예상 외인지는 모르겠지만, 꼬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공원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는 집념으로 뛰어서인가,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대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힘이 들어 아스팔트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가쁜 숨을 고르고 있자니, 점차 호흡이 느려지면서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뭐였던 거야, 아까 그건……."
가벼운 마음으로 하려던 조깅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꼬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나는 조깅을 하다가 목적지인 신월 공원에서 잠깐 쉬다 가려고 했고, 그 곳에서 괴상망측한 옷을 입고 황금빛 빛이 뿜어져 나오는 그림 중앙에 서 있던 괴상망측한 꼬마를 보았고, 초고속으로 공원을 벗어나 여기까지 단숨에 뛰어왔다. 이 모든 사건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코스프레에 중2병인가. 나도 참, 사람 운이 없다니깐.'
그래, 그거다. 황금빛은 크리스마스 전구같은 것일 테고, 꼬마는 그저 코스튬 플레이에 눈을 떠 버린 중증 중2병 환자일 것이다. 하아, 이런 악몽이 또 어디 있을까. 정말이지 단순한 꿈이었으면 좋겠다. 희진 한 명뿐이면 됐지, 왜 하늘은 나에게 이런 악연을 안겨 주시는 것일까. 설마, 이러다 나도 중2병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건가?

"나도 참, 뭔 헛소리야."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야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제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아침 시간이 아슬아슬할 텐데. 어디, 지금 시간이…….
"으, 으앗! 언제 시간이…!"
무정한 스마트폰의 대기 화면은 현재 시간이 5시 10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라, 내가 대체 어디서 이렇게 시간을 보낸 거지? 분명 공원에 도착할 때만 해도 4시 43분이었는데? 아니, 그것보다 지금 한가하게 여기 앉아있을 때냐, 나란 놈은!
"아? 물통 어디 갔어!"
서둘러 돌아가기 위해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대충 쑤셔넣고 일어나보니 물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공원에서 꼬마를 봤을 때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젠, 자아아아아아앙──────! 이게 뭐냐고오오오오오오!"
할 수 없다, 물통은 포기하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 어차피 물통이야 다시 사면 되니까! 아, 짜증나 미치겠다! 이게 전부 다,

판타지 때문이야!

 

─Prologue end.

  • ?
    개소실 2013.08.31 08:12
    언제 쓸까여.
  • profile
    코인천국 2013.09.01 05:04

    재미있을꺼 같아요.ㅋㅋ

    원래 소설엔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연재하다가 그만둔 고민상담부 이후로 약간 관심이 생겼네요.ㅋㅋ

    인연?이 잘 연결되서 저희 사이트에서 연재를 하셨으면.ㅋㅋ 하하^^

  • ?
    개소실 2013.09.01 18:04
    댓글 감사합니다 :)
    저 역시 고민상담부를 쓰신 그저님과 같은 목적으로 이 '판중모'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이상하게도 뼈대→본편→프롤로그→본편 수정Ver. 식으로 써나갔지만요... 뭐, 여튼 관심 가져주신다는 것 자체로도 감사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연재일은 매주 토, 작가의 머리가 나빠지는 날엔 일요일이 되겠습니다. 부디 좋은 하루 되시길 :)
  • profile
    Just 2013.09.02 04:49
    여기선 그저가 안되는 바람에 직역한 Just로 활동중이랍니다 선배님.
  • ?
    개소실 2013.09.02 04:55
    그렇습니까 Just님. 숙지하겠습니다.
  • profile
    하얀나무 2013.09.02 02:37

    많은 판타지 소설을 봤었는데, 판타지를 싫어하는 주인공은 처음보네요.

    제가 많이 안접해봐서 그런건지도 모르겠지만 ..

    다음주 토요일 기대할께요 'ㅁ'

  • ?
    개소실 2013.09.02 04:59
    네 :) 댓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흔한 주제일지도 몰라, 하는 불안감도 섞여있었습니다. 그럴만도 한게, 조금 찾아보면 아시겠지만 판타지 애니 중 대표적인 뽕빨(?)물의 주인공이 제 주인공과 똑같은 케이스거든요(는 하늘의 유실물... 아니 걔는 비정상적인 녀석이니까). 여튼 '어라, 이거 이거랑 비슷해요' 같은 소리 안 듣도록 열심히 노력토록 하겠습니다!
  • profile
    하얀나무 2013.09.05 06:47

    하늘의 유실물은..생각도 못해봤네요 ㅋㅋㅋ 친구 때문에 ' 어라, 이거 이거랑 비슷해요 '

    라고 말하는 게 없어져 버려서 말이죠 으허허 ;ㅁ; 네!

  • profile
    공책상자 2013.09.07 06:07
    저 역시 판타지는 많이 싫어함
  • ?
    개소실 2013.09.07 17:37
    ...이 글이 판타지라 꽤나 가슴아픈 발언...
    뭐, 괜찮습니다! 이 글의 취지는 판타지를 더럽게 싫어하는 주인공을 괴롭히기 위해 작가가 일부러 판타지 세계로 보내버린다는 설정이니까요.
  • profile
    공책상자 2013.09.07 17:39
    ㅋㅋㅋㅋㅋㅋ
    단박에 이해가 됬네요
    저는 절대로 보내지 말아주세요

  1. End World-3화:버려진 세계(1)

  2. 균열자(1-3)

  3. Sc. 3

  4. End World:2화-전쟁(2)

  5. 균열자(1-2)

  6. Sc. 2 (Small Creature)

  7. (밀린 End World)End World.2-전쟁(1)

  8. Small Creature. 1

  9. 균열자(1-1)

  10. 판타지는 중2병을 모른다 Pro. - 판타지는 프롤로그가 생명이다.

  11. End World-프롤로그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Next
/ 9
누군가가 채팅방에서 당신을 호출했습니다.